걸어서 달을 건너는 방법
1.
달의 궁전을 다시 읽었다. 2000년경에 처음 읽었던 것 같고, 그 후로도 몇 년에 한번씩은 손에 잡았지만 최근 10년 이내는 읽었던 기억이 없다. 이번에 읽은 직후 든 소감은, 처음 읽은 직후의 소감하고 같다 - 폴오스터는 정말 최고의 이야기꾼이라는 것. 소설을 읽는 도중에는 기이하면서도 실감나는 이야기에 푹 빠지지만, 읽은 다음에는 바로 작가의 상상력과 필력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작품에 앞서 작가가 다가온달까. 작가에게는 그리 달갑지 않은 칭찬인지도 모르겠다.
누군가 이 소설이 잘 읽히지 않는다고 했지만, 나는 이 소설을 한번 손에 쥐면 오히려 멈추기가 더 어려었다. 구조가 불균형하다, 우연이 너무 많다 하지만, 막상 소설을 읽는 동안에는 폴오스터가 그리는 세계, 포그가 경험한 세계에 푹 빠져드는 것이다. 막상 읽는 동안에는 모두 앞뒤가 맞아 떨어지는 이야기, 이렇게 되지 않으면 안되는 이야기, 처음부터 그렇게 '필연'적으로 정해져있는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정신없이 다 읽은 다음에, 이거 너무 우연적인거 아냐, 이런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지만, 이런 평가에는 아마 작가한테 '당한거 아닌가' 하는 느낌때문에 분한 마음이 좀 있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리고 너무 우연한 이야기 아니냐는 독자에게, 작가는 에핑의 입을 빌려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연의 일치 따위는 없어. 그런 말은 무식쟁이들이나 쓰는 거야.
2.
'달의 궁전' 은 포그가 혼자 살기 시작했던 허름한 집 근처의 중국음식점 이름이다. 그저 식당에 불과하지만, 이제 처음으로 완전히 독립한 포그가 의기소침해져 있을 때 그 그 간판을 보고, 문맨Moon man 밴드와 함께 서부로 간 빅터 삼촌이 생각나서 용기를 얻게 된 계기가 된 이름이다. 처음으로 혼자 생활하게 된 포그는 위축되어 있었지만, 그 이름이 포그에게 위안을 주는 것이다.
'달의 궁전'이 막 독립한 포그에게 위안을 준 것처럼, 에핑, 바버, 키티 모두 포그가 삶의 출발점에 혼자 설 수 있도록 도와준 사람들이다. 유일한 혈육으로 알았던 빅터 삼촌이 급사한 후 포그는 절망한 상태였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해 손에 쥔 돈푼은 삼촌의 장례식을 치르느라 대부분 써버린 상태였다. 포그는 천애고아가 되었고, 무기력했다. 아무것도 하려고 하지 않았고, 도움도 청하지 않았고, 생활비와 음식을 점점 줄이면서 자신의 소멸을 바라고 있었다.
나와 같은 처지에 있는 학생들은 여러 가지 선택을 할 수 있었다. 장학금, 대부금, 근로 학업 프로그램 등. 하지만 일단 그런 것들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하자 역겨운 느낌이 치밀어 올랐다. 그것은 갑작스럽고 무의식적인 반응, 급격학 솟구치는 메스꺼움이었다. 나는 내가 그런 것들을 조금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치리고 그것을 모두 거부했다. ... 내가 왜 그런 짓을 했는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그 당시에 나는 셀 수도 없이 많은 이유를 꾸며 냈지만, 결국 따지고 보면 그것은 아마도 절망 때문이었을 것이다. .. 나는 세상에 침을 뱉고 싶었다.
그러나 거의 소멸되기 직전에, 포그는 그에게 사랑을 느끼게 해 준 키티를 만나고, 사물을 분별하는 법을 알려준 에핑을 만나고, 항상 공백의 자리로 있었던 아버지를 만난다. 그리고 이들 모두를 잃는다. 그렇지만 포그는 더 이상 예전처럼 좌절에 빠지지 않는다. 그는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걸어서 사막을 횡단하고, 더 이상 걸을 수 없는 곳까지 걸어가서 태평양을 보며 속으로 이렇게 말한다. "여기가 내 삶이 시작되는 곳이야." 처음에도 사랑하는 사람 - 어머니, 빅터 삼촌 - 을 모두 잃은 상태였고, 마지막에도 사랑하는 사람 - 에핑, 바버, 키티 - 을 모두 잃었지만, 삶을 대하는 포그의 태도는 종전과 사뭇 다르다. 그는 절망하지 않고, 걸어서 도착한 그곳에서부터 자기 삶을 살기로 작정한 것이다.
나는 마침내 그 기회를 내가 발전하는 데 필요한 조건의 한 형태,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통해 나 자신을 구하는 방법으로 보게 되었다. 그녀(키티 우)를 만난 것이 시작이었다. 그 뒤로 여러 가지 이상한 일들이 일어났다. 나는 휠체어에 의지한 노인에게서 일자리를 얻었고, 내 아버지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유타 주에서부터 캘리포니아 주까지 걸어서 사막을 가로지르기도 했다. 그것은 물론 아주 오래 전의 일이었지만, 나는 지금도 그 당시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내 삶의 출발점으로서.
인간이 달에 도착했다는 것으로 이 소설은 운을 떼는데, 그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여야하는지 모두들 난감해하지만 포그가 느끼기에 관찰된 달의 표면은 미국 서부의 사막과 흡사하다. 그런데 이 서부 사막이라는 공간은 포그를 제외하고 다른 중요 인물들에게 좌절감을 안겨주는 곳이다. 빅터 삼촌은 이곳에서 실패했고 결국 죽었다. 에핑은 이곳에서 살인을 저질렀고, 자기의 인간성을 망쳤고, 결국 이로 인해 다리를 잃고 평생 신분을 숨기고 살면서 그 죄값을 치렀다. 바버는 이곳으로 가는 여정 도중 에밀리의 무덤 앞에서 추락했고, 결국 죽었다. 그러나 이에 반해서 포그는 걸어서 이곳을 건넜다. 포그가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빅터, 에핑, 바버 덕분이 아닐까 싶다. 이들과는 모두 사별했지만, 이들로부터 얻은 애정, 우정, 사랑이 포그를 좌절하지 않고, 무사히 사막=달을 건너게 해 주고, 삶의 출발점에 서게 해 준 것이다.
3.
이야기에 우연이 있었을지언정, 그 우연은 항상 안타까운 곳에서 그쳤다. 그 우연으로 인해 이들의 관계가 진척된 것은 단 하나도 없다.
비난을 받아야 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일을 받아들이기가 조금이라도 더 쉬워진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모두 놓쳐 버린 관계, 잘못된 시기, 어둠 속에서 생겨난 실수였다. 우리는 언제나 잘못된 시간에 옳은 곳에, 옳은 시간에 잘못된 곳에 있었다. 언제나 서로를 놓쳤고, 언제나 간발의 차이로 전체적인 일을 알지 못했다. 우리의 관계는 결국 그렇게, 잃어버린 기회의 연속이 되고 말핬다. 그 이야기의 조각들은 처음부터 모두 거기에 있었지만 누구도 그것을 어떻게 이어붙여야 할지 몰랐다.
4.
어찌보면, 결국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다. 포그는 키티로부터 사랑을 받았고, 빅터, 에핑, 바버로부터도 사랑을 받았고, 이 사랑이 포그를 구한 것이다.
좌절한 사람을 인생의 시작점에 설 수 있게 할 수 있는 것이, 다른 뭐가 있겠는가.
나는 절벽 가장자리에서 뛰어내렸지만 떨어져 죽기 직전에 뭔가 예사롭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내가 그렇게 사랑을 받는다는 사실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 떨어져 내리는 두려움이 줄어들지는 않았더라도 그 두려움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새로운 조망을 얻은 것이었다. 나는 가장자리에서 뛰어내리려 했지만 마지막 순간에 뭔가가 팔을 뻗쳐 허공에 걸린 나를 붙잡아 주었다. 나는 그것이 사랑이었다고 믿는다. 사랑이야말로 추락을 멈출 수 있는, 중력의 법칙을 부정할만큼 강력한 단 한 가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