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그르니에 "섬"

by 정호성

이 책에 알베르 까뮈의 멋진 서문이 달려있다는 풍문은 들은 적이 있다. 일부러 서문을 마지막에 읽어보았는데, 역시 좋은 서문이었지만 나중에 읽어보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먼저 읽어보았으면 이 글에 너무 큰 기대를 한 뒤 실망했거나, 이 글을 필요 이상으로 심오하게 받아들였을 것 같다. 까뮈는 "우리들에게는 보다 섬세한 스승이 필요하였다. 예컨대 다른 바닷가에서 태어나, 그 또한 빛과 육체의 찬란함에 매혹당한 한 인간이 우리들에게 찾아와서 이 겉에 보이는 세상의 모습은 아름답지만 그것은 허물이지게 마련이니 그 아름다움을 절망적으로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그 모방 불가능한 언어로 말해 줄 필요가 있었다."고 위 서문에 썼다. 그런데 내 소견으로 이 책에서는, 겉에 보이는 세상의 아름다운 모습은 간혹 눈에 띄고, 그 아름다움이 허물어지는 모습은 별로 눈에 띄지 않고, 그 허물어지는 모습을 절망적으로 사랑하는 한 사람의 모습은 좀 시큰둥하게 눈에 띈다. (그가 충분히 절망한 것처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인 것일까.) 그리고 모방 불가능한 언어 - 이것은 어떤 작가에게 있어서도 최고의 찬사일 것인데 - 라고 할만한지는 더욱 모르겠다.


약간 박한 평가이지만, 그것은 결국 까뮈의 서문 때문일 수도 있다. 나쁘지 않은 책이고, 마음에 와닿은 구절도 적잖은데, 까뮈의 극찬을 접하고 나니 내 이해가 부족한 것이 아닌가 자책하다가도, 다시 읽어봐도 그대로이니 반발심이 커지는 것이다. ㅋㅋ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은 보로메 섬. 이 부분을 절망으로 읽어야할지 희망으로 읽어야할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고양이 물루의 마지막 부분도 제법 마음에 드는데, 이 부분은 마치 다른 작가가 쓴 것처럼 약간 이질적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아래는 인용 부분.



말없이 어떤 풍경을 고즈넉이 바라보고만 있어도 욕망은 입을 다물어버리게 된다. 문득 공(空)의 자리에 충만이 들어앉는다. 내가 지나온 삶을 돌이켜보면 그것은 다만 저 절묘한 순간들에 이르기 위한 노력이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어떤 존재들을 사랑하게 될 때면 그에 대해서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지게 마련이어서, 그런 것은 사실 우리들 자신에게밖에는 별 흥밋거리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적절한 순간에 늘 상기하지 않으면 안된다.



고양이들에 관한 이야기는 수없이 많다. 나는 그 이야기들을 한데 모아보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나는 이미 잔 다종, 마냉, 아벨 다시 등의 책자들을 읽었다. 또 나는 몽클리프의 비길 데 없이 감미로운 저서 『고양이』도 읽었다. 나는 앙리 3세가 고양이라는 말만 들어도 경련을 일으켰다는 것과(그는 좋지 못한 왕이었다) 레닌은 옛날에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고양이를 쓰다듬으면서 그 접촉을 통하여 새로운 힘을 얻곤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처럼 부질없는 문제에 대하여 박학해진다는 것은 마음에 든다. 인간의 삶이란 한갓 광기요, 세계는 알맹이가 없는 한갓 수증기라고 여겨질 때, ‘경박한’ 주제에 대하여 ‘진지하게’ 연구하는 것만큼이나 내 맘에 드는 일은 없었다. 그것은 살아가는 데, 죽지 않고 목숨을 부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 하루하루 잊지 않고 찾아오는 날들을 견디어내려면 무엇이라도 좋으니 단 한 가지의 대상을 정하여 그것에 여러 시간씩 골똘하게 매달리는 것보다 더 나은 일은 없다. 르낭(Ernest Renan)은 아침마다 히브리어 사전을 열심히 읽곤 함으로써 삶의 위안을 얻었다. 나는 ‘연구’라는 것에 그 이외의 다른 흥미가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우리가 배우게 되는 것은 무엇이나 다 보잘것없는 것들이다. 그러나 우리들로 하여금 최후를 기다리는 동안 인내하는 놀이를 배운다는 것은 타기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어떤 도시를, 어떤 짐승을 사랑하는 것과 어떤 여자를, 어떤 친구를 사랑하는 것 — 우리는 머릿속으로는 이런 것을 서로 구별하려고 애쓰고, 마음속으로는 이런 것이 다 같은 것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한다 — 이런 모든 애정을 표시하는 데는 오직 한 가지 말밖에는 없다. 사람들이 묵주신공을 우습게 아는 것을 보고 그것을 옹호하려고 어떤 설교사가 이렇게 말했다. “사실 언제나 똑같은 내용이긴 하지요. 그렇지만 사랑하는 마음을 나타내려고 할 때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말 이외에 다른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은 마음속에서 모든 순간들과 모든 존재들을 하나로 합쳐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고양이와 같이 지내는 데 습관이 되어 있지 않았다. 이때 습관이란 말은 사랑이란 말과 동의어이다.



나는 혼자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낯선 도시에 도착하는 것을 수없이 꿈꾸어 보았다. 그러면 나는 겸허하게, 아니 남루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그렇게 되면 ‘비밀’을 간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 자신에 대하여 말을 한다거나 내가 이러이러한 사람이라는 것을 드러내보인다거나, 나의 이름으로 행동한다는 것은 바로 내가 지닌 것 중에서 그 무엇인가 가장 귀중한 것을 겉으로 드러내는 일이라는 생각을 나는 늘 해왔다. 무슨 귀중한 것이 있기에? 아마 이런 생각은 다만 마음이 약하다는 증거에 지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즉 단순히 살아가는 일뿐만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확립하기’ 위하여 누구에게나 반드시 필요하게 마련인 힘이 결여되어 있음을 나타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이제 환상에 속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이 같은 타고난 부족함을 무슨 드높은 영혼의 발로라고 여기지는 않는다. 그러나 나에게는 여전히 그런 비밀에 대한 취향이 남아 있다. 나는 오로지 나만의 삶을 갖는다는 즐거움을 위하여 별것 아닌 행동들을 숨기기도 한다.



자기가 사랑하는 그 꽃들을 아깝다는 듯 담장 속에 숨겨두는 그 사람들의 심정을 나는 너무나도 잘 이해할 수가 있었다. 하나의 정열은 그 주위에 굳건한 요새의 성벽들을 쌓아 두고자 한다. 그때 나는 하나하나의 사물을 아름답게 만드는 비밀을 예찬했다. 비밀이 없이는 행복도 없다는 것을.



달은 우리에게 늘 똑같은 한쪽만 보여준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의 삶 또한 그러하다. 그들의 삶의 가려진 쪽에 대해서 우리는 짐작으로밖에 알지 못하는데 정작 단 하나 중요한 것은 그쪽이다.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서 도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 그것은 불가능한 일 — 자기 자신을 되찾기 위하여 여행한다고 할 수 있다. 예수회 신자들이 육체적 단련을, 불교 신자들이 아편을, 화가가 알코올을 사용하듯이, 그럴 경우 여행은 하나의 수단이 된다. 일단 사용하고 나서 목표에 도달하면 높은 곳에 올라가는 데 썼던 사닥다리를 발로 밀어버리게 된다.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의 모습을 인식하는 데 성공하고 나면 바다 위로 배를 타고 여행할 때의 멀미나던 여러 날과 기차 속에서의 불면 같은 것은 잊어버린다(자기 자신의 인식이라지만 실은 자기 자신을 초월한 다른 그 무엇의 인식일 것이다). 그런데 그 ‘자기 인식(reconnaissance)’이란 반드시 여행의 종착역에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은 그 자기 인식이 이루어지고 나면 여행은 완성된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탄생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통과해 가야 하는 저 엄청난 고독들 속에는 어떤 각별히 중요한 장소들과 순간들이 있다는 것이 사실이다. 그 장소, 그 순간에 우리가 바라본 어떤 고장의 풍경은, 마치 워대한 음악가가 평범한 악기를 탄주하여 그 악기의 위력을 자기 자신에게 문자 그대로 '계시하여' 보이듯이, 우리들 영혼을 뒤흔들어 놓는다. 이 엉뚱한 인식이야말로 모든 인식 중에서도 가장 참된 것이다. 즉 내가 나 자신임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즉 잊었던 친구를 만나서 깜짝 놀라듯이 어떤 낯선 도시를 앞에 두고 깜짝 놀랄 때 우리가 바라보게 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우리들 자신의 진정한 모습이다.



나폴리에 살고 있을 때 나는 아침마다 만(灣)을 굽어보는 플로리디아나 장원(莊園)을 찾아가서 시 계가 정오를 칠 때까지 담배를 피우면서 이리저리 거닐곤 했다. 그 한가로운 무위의 시간들은 파리에서의 열에 들뜬 듯한 시간들보다도 더 내 가슴을 가득하게 해주었다. 이같이 가슴 깊이 파고드는 풍경 속에서 이 시대의 모든 사람들이 일하는 데에만 골몰해 있다는 것은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파리나 런던에서 일을 한다는 것은 그래도 괜찮다. 그러나 태양과 바다가 영원히 지배하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즐기고 고통하고 표현하는 일로 만족해야 할 것이다. 만물의 중심에 있는데 이 땅 덩어리의 한 끝을 조금 움직여본들 무엇하겠는가?



북쪽의 어느 낯선 고장으로 자리를 옮기고 보니 내게는 삶이 무겁고 시가 없어 보였다... 그런데 어느 날 어느 꽃가게가 '보로메 섬으로!'라는 간판을 달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 내가 얼마나 놀랐겠는가. 그 대조에 나는 가슴이 저려오는 것을 느꼈다. ... 나는 거기서 가장 먼 곳의 부르는 소리 같은 것을, 신기루의 매혹 같은 것을 읽게 되는 것이었다. ... 허름한 가게치고는 너무 화려한 그 이름은 그의 전 주인이 지은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전 주인은 이탈리아 외교관과 어떤 관계가 있는 여자였다. ... 그 사실은 내게 어떤 귀띔같이 여겨졌다. 가장 먼 곳과도 작별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가장 가까운 것 속에서 피난처를 찾이 않으면 안 될 모양이었던 것이다.

여행을 해서 무엇하겠는가? 산을 넘으면 또 산이요 들을 지나면 또 들이요 사막을 건너면 또 사막이다. 결국 절대로 끝이 없을 터이고 나는 끝내 나의 둘시네를 찾지 못하고 말 것이다. 그러니 누군가 말했듯이 이 짤막한 공간 속에 긴 희망을 가두어두자. 마죄르 호반의 자갈밭과 난간을 따라가며 사는 것은 불가능하니 그저 그것의 영광스러운 대용품들이나 찾을밖에! 그럼 무엇을? 에-또, 태양과 바다와 꽃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나 나에게는 보로메 섬들이 될 것 같다. 그리도 가날프게 그리도 인간적으로 보호해 주는 마른 돌담 하나만으로도 나를 격리시켜 주기에 족할 것이고 어느 농가의 문턱에 선 두 그루의 시프레 나무만으로도 나를 반겨 맞아주기에 족할 것이나….. 한 번의 악수, 어떤 총명의 표시, 어떤 눈길….. 이런 것들이 바로 이토록 가까운, 이토록 잔혹하게 가까운 - 나의 보로메 섬들 일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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