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을 들고 있는 아이 1>
차라투스트라는 맨 처음 산에서 내려와서 다시 산으로 되돌아가 회복하기를 반복합니다. 다시 산속의 동굴로 돌아온 그는 산 아래로 내려가고 싶은 간절함에 휩싸입니다. 산을 오르고 내려가는 것은 상승과 몰락을 의미하며 산 위에서 느끼는 고독은 그를 회복하게 만들지만, 다시 사람들 속으로 돌아가고 싶은 사회적 존재로서의 자각 혹은 자신의 이야기를 전하고 싶은 욕망이 동시에 작용한 결과입니다.
그러고 나서 차라투스트라는 다시 산속으로, 그의 동굴의 고독 속으로 돌아가, 사람들에게서 벗어났다. 씨를 뿌린 농부처럼 때를 기다리면서, 그러나 그의 영혼은 아주 초조해졌고, 그가 사랑했던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 또한 간절해졌다.
차라투스트라는 산 아래에서 자신의 의지와 기대를 소진하고 고독으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휴식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일을 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것처럼 차라투스트라도 조급함을 느낍니다. 그는 다시 무리 속으로 내려갈 정도로 무르익었을까요?
"꿈속에서 나 그 무엇에 놀라 잠을 깨고 만 것이지? 거울을 들고 있는 한 아이가 내게 다가오지 않던가? '오 차라투스트라여, 거울에 비친 그대의 모습을 보시라.' 그 아이는 내게 말했지. 거울 속을 들여다본 나는 비명을 질렀고, 나의 마음은 뒤흔들렸지. 거울 속에서 내가 아니라 악마의 험상궂은 얼굴과 비웃음을 보았던 것이다.
'거울'은 자기 객관화의 상징입니다. 어떠한 왜곡된 의도를 가지지 않은 순수한 아이는 차라투스트라의 앞에 거울을 비춰줍니다. 거울에 비친 모습과 자신이 생각하던 모습에 괴리가 있다면 그것은 나의 의도와 표현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악마의 험상궂은 얼굴과 비웃음이 보였다는 것은 내가 한 말과 표정이 다른 사람들에게 왜곡되어 전달될 수 있음을 뜻합니다. 그리고 차라투스트라는 충분히 그럴 수 있음을 짐작했을 것입니다. 그가 가진 조바심은 왜곡된 자신의 의도를 고쳐 잡으려는 데에 기인합니다. 그의 불안은 꿈의 형태로 새어 나옵니다.
진정, 나는 그 꿈이 보여주고 있는 조짐과 경고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나의 가르침이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 잡초가 자라나 밀의 행세를 하려 든다는 것이다!
순수한 아이의 거울을 통해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을 엄습한 조바심의 정체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무의식이 의식에게 경고해주지 않았더라면 그는 사람들에게 밀이 아닌 잡초를 제공할 뻔했습니다. 그것은 차라투스트라가 혹시라도 가졌을지 모를 우월함 때문만은 아닙니다. 사람들이 스스로 만든 자신들의 우상을 숭배하여 차라투스트라의 말을 자신들의 뜻대로 해석하는 위험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조바심의 정체와 사람들과의 소통에 잠재해 있는 위험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가 하산해야 할 때가 온 걸까요?
나 벗들을 잃고 말았다. 잃은 벗들을 찾아 나서야 할 때가 왔다!"... 그의 독수리와 뱀이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앞으로 다가올 행복이 아침놀처럼 그의 얼굴에 어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 벗들을 찾아, 그리고 나의 적들을 찾아 다시 산을 내려가도 되겠다! 차라투스트라는 다시 가르치고 베풀며 사랑하는 자들에게 더없이 큰 사랑을 보여주어도 되겠다.
그가 벗을 잃은 것은 자신이 생각한 사상이 그들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는 다시 그들을 찾아 나서 자신의 가르침을 전달하려 합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시도가 무산되었음에 실망하지 않고 다시 일어나 도전하려 합니다. 그의 내면은 이제 외부로 고스란히 드러날 길을 찾았고, 왜곡된 얼굴은 제 모습을 찾고 떠오르는 태양을 담게 되었습니다. 차라투스트라는 타인을 자신의 생각대로 조종하려 하는 악마의 모습 대신 넘치는 태양의 밝음을 그들에게 흘려보낼 준비를 마쳤습니다.
네덜란드의 풍속화가 피터르 브뤼헐은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에 나오는 한 장면을 묘사합니다. 이카루스는 아버지 다이달로스와 함께 크레타 섬에서 탈출하기 위해 날개를 만들었습니다. 젊은 이카루스는 날아오른 것이 너무 기뻐서 아버지의 충고를 무시하고 태양에 너무 가까이 날았고, 날개를 고정하고 있던 밀랍이 녹아 추락하고 맙니다. 자신의 능력에 대한 객관화를 하지 못한 이카루스는 자신의 무모함 때문에 몰락합니다. 화가는 그림의 전면에 농사를 짓는 농부를 내세웁니다. 그의 시선을 따라간다고 해도 이카루스를 찾을 수 없습니다. 그는 철저히 이 사건에 무관심하며 자신의 일상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화면에서 어디에 이카루스가 있는지 찾아봅시다. 수평선 너머의 떠오르는 태양의 주변에도 바다 한가운데를 떠다니는 범선 주변에서도 추락하는 젊은 영웅의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물가에 한 마리의 매와 한 남자의 머리 위로 추락하는 젊은이의 두 다리가 드러납니다. 화가는 이다지도 타인의 고통에 무관심한 우리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우리가 그의 고통을 우리 안에서 찾는다면, 거울을 들어 내 안의 고통을 타인의 고통과 동기화시킨다면 이 젊은이의 죽음은 그림의 중심으로 돌아와 모두의 주목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는 이러한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기 위한 대책을 마련하게 될 것입니다. 그를 화면의 중심으로 되돌리기 위해서는 우리의 관심과 사랑이 필요합니다. 라틴어의 'Interesse'는 '참여하다'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참여는 '관심('interest')에서 비롯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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