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니체 85일 차 - 베푸는 자 모두의 외로움?

<밤의 노래 2>

by Homo ludens

[칠흑 같은 것에 대한 갈증]

차라투스트라의 '갈망을 위한 갈망'은 자신에게 그치지 않습니다. 자신의 갈망으로 인해 베풂을 받은 자들의 '갈망'을 더 자극합니다. 그리고 밤의 시간이 다가오면 받은 자들의 갈증이 자신에게도 찾아올 것을 갈망합니다.

나의 아름다움으로부터 허기가 자라난다. 나 내가 빛을 비춰준 바 있는 자들에게 고통을 주고, 내가 베푼 바 있는 자들의 것을 도로 빼앗고 싶구나. 나 이렇듯 악의에 굶주려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을 베풀기만 하는 태양에 대한 비유로 설명했듯, 차라투스트라는 주기만 할 수밖에 없는 일방향적 관계에 의한 결핍을 느낍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도 관계가 규정되고 고정되는 순간 그들은 각자의 역할에만 충실하게 됩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지혜를 받은 자들이 자신에게 종속되거나 자신의 지혜로 인해 정체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차라투스트라의 지혜에 의해 고통을 잊은 자들은 그 상태에 만족하여 또 다른 시도를 주저하게 될 것입니다. 차라투스트라에게 받은 것을 잃게 되는 순간 그들은 다시 그것을 얻으려는 의욕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베풀기만 하는 자의 위험은 그가 수치심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데 있다. 나누어주기만 하는 자의 손과 심장은 나누어주는 일 하나만으로도 못이 박힌다.... 오, 베푸는 자 모두의 외로움이여!, 오, 빛을 발하고 있는 자 모두의 침묵이여!

또한 남에게 베풀기만 하는 사람은 자신의 선함에 취해 어떻게 베푸는 것이 상대를 더 배려하는 것인지를 잊게 됩니다. 받는 사람이 느끼게 되는 수치심을 고려하지 못하고, 주고받는 고정된 역할에 몰두하게 됩니다. 손과 심장에 못이 박히는 것은 예수가 우리에게 베풀기만 했던 성경의 내용을 인용한 것입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예수의 베풂이 받는 자들로 하여금 언제나 예수에게 바라고 기대하게 만드는 종속적 관계를 만들었다고 비판합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예수의 행위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가진 노예적 습성을 꼬집습니다. 나눔이 진정한 소통이 되지 못하고 일방통행이 될 때, 빛을 발하는 자와 받는 자는 서로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 침묵에 빠지게 됩니다. 주는 자는 듣는 자의 귀가 필요할 뿐이고, 받는 자는 주는 자의 손이 필요할 뿐입니다. 받는 자에게 주는 자는 과시욕에 빠진 자로 비칠 위험이 있고, 주는 자에게 받는 자는 배은망덕한 자로 비칠 수 있습니다.

오, 캄캄한 자들이여, 칠흑 같은 자들이여, 너희가 비로소 빛을 발하는 것에서 따스함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오, 너희가 비로소 빛의 젖가슴에서 젖과 상쾌한 기운을 빨아들이는 것이다.... 밤이다. 아, 내가 빛이어야 하다니! 그리고 칠흑 같은 것에 대한 갈증이여! 그리고 외로움이여!

태양의 고뇌는 어둠이 완전히 사라지는 순간 그의 선함이 비출 곳을 잃는다는 것입니다. 받는 자가 없이는 주는 자의 의미는 상실됩니다. 차라투스트라는 밤을 기다립니다. 자신의 역할이 주는 자로 규정된 낮을 지나 밤이 오면 '창조적 의무'에서 벗어나 누군가로부터 빛을 받아들이는 수동적인 환희, 즉 갈증을 느끼게 됩니다. 이 외로움은 낮에 느끼는 자신의 풍요로움의 거울입니다. 낮의 풍요로움이 커질수록 밤의 외로움도 커집니다. 받는 자들이 주는 환호의 감사에 둘러싸인 낮과 대조적으로 밤은 외로움으로 둘러싸인 허기의 시간입니다. 차라투스트라는 낮의 긍정성과 밤의 부정성이라는 고정된 가치에서 벗어나 낮의 부정성과 밤의 긍정성을 지적하는 가치의 전도를 통해 생의 전체를 긍정하는 아모르파티(amor fati)를 이야기합니다.


image.png <빛의 제국>, 르네 마그리트, 1954

벨기에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René Magritte, 1898-1967)는 모순되는 것들을 눈앞에 드러내는 것에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초현실주의 선언문의 저자 앙드레 브르통(André Breton, 1896-1966)의 시 '새'를 읽고 낮과 밤을 결합하는 영감을 얻은 마그리트는 <빛의 제국>을 완성합니다. 마그리트는 브르통의 첫 구절을 인용했는데, "오늘 밤 태양이 빛나기만 한다면"이라는 구절은 마그리트가 낮과 밤이 함께 존재하며 하나라고 생각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는 이러한 생각이 비현실적이거나 시적인 것이 아닌, 합리적이거나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과 일치한다고 주장합니다.

세상에는 밤이 항상 낮과 동시에 존재합니다. (슬픔이 어떤 사람에게는 항상 존재하고 행복이 다른 사람에게는 항상 존재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시적이지 않습니다. 시적인 것은 그림의 시각적 이미지입니다. - 르네 마그리트 -

그림 속 어둠에 둘러싸인 집은 가로등 빛의 외로운 베풂으로 은은히 빛나고 있습니다. 2층 창에서 새어 나오는 빛은 누군가가 살고 있음을 의미하지만 밖의 가로등과는 소통하지 않고 각자의 고립 상태에 있습니다. 주변의 검은 나무 숲은 가로등 빛과 어둠의 주고받는 관계를 강화시키고 있습니다. 시선을 하늘로 올리면 반전이 일어납니다. 마땅히 밤하늘의 별과 달이 있어야 할 곳에 하얀 구름이 떠있는 낮의 하늘이 보입니다. 빛의 과잉으로 어둠이 없는 상태에서 베풀기만 하는 빛은 하단의 어둠에 자신의 빛이 도달하지 않음으로써 차라투스트라가 말하는 베푸는 자의 외로움을 잘 보여줍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낮과 밤은 개인이 느끼는 관점의 한계로, 넓은 시야에서 본다면 낮과 밤은 개념으로만 구분된 것일 뿐, 온전한 밤과 온전한 낮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내면으로 좁혀 들여다보면 군중 속의 외로움과 홀로 있지만 복잡한 심경 등 우리는 모순이라는 현실을 마주하고 살고 있습니다. 화가 마그리트는 이러한 낯설게 하기라고 하는 데페이즈망(Dépaysement) 기법을 통해 관습적 사고를 뒤흔들고 삶의 본질적인 부분을 고민하고독 유도합니다. 낮과 밤 가운데 하나를 고르는 이분법적 선택은 사실 우리가 선택할 수 없는 것을 선택할 수 있다고 하는 착각 속에서만 벌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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