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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mo ludens Mar 20. 2024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 3장

위대한 각성 - 기원전 7세기부터 기원전 5세기: 그리스

고대 그리스미술을 나누는 세 시기는 이렇게 된다.

1. 아르카익 (Archaic): 기원전 700-480

2. 클래식 (Classic): 기원전 480-323

3. 헬레니즘 (Hellenism): 기원전 323- 146년 (혹은 기원전 30년까지)


미술의 양식 구분을 정확한 시기로 구분 짓는 것은 굉장히 이상해 보일지 모른다. 새해를 맞이하며 다짐하는 각오처럼 "오늘부터 이렇게 그려야겠다!"라고 마음먹고 모든 사람들이 다른 방식으로 그릴리는 없기 때문이다. 미술사학자들이 시대를 구분 짓는 기준은 거대한 양식의 변화를 관찰하고 그 변화의 계기를 마련하고 가속하는 역사적 사건과 맞닿은 시간을 찾아 연결하는 것이다.


위대한 승리

기원전 13세기 호메로스가 일리아스에서 다루던 시기. 그리스의 폴리스들은 미케네 문명의 범주에 속했다. 크게는 에게 문명이라 불리던 미노스문명과 미케네 문명은 이집트 미술과는 구분되는 다소 자유롭고 부드러운 표현의 유물을 남겼다. 청동기 문명의 헬라스인들 (고대 그리스인들)은 북방에서 내려온 유목민족인 도리스인들의 철기 문명에 속절없이 지배당하고 말았다. 여느 유목민들과 같이 그들은 미술의 발전에 기여를 하기는커녕 퇴보 혹은 예술적 생산활동을 등한시했다.

기원전 8세기경부터 헬라스인들은 이집트미술의 표현을 답습하며 다시 예술활동을 재개한다. 그들에게 '위대한 각성'을 일으키는 전환점이 된 사건은 페르시아 전쟁에서의 승리이다.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 1세 (Xerxes I)는 소아시아 지역까지 진출해 그리스 폴리스에 공물을 요구했고 밀레투스를 비롯한 몇몇 폴리스는 그리스 본토의 폴리스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리하여 벌어진 페르시아 전쟁은 이후 세계사의 지형을 바꾸는 사건이 되었다. 보잘것없는 도시국가의 연합체가 대제국 페르시아 제국에 대항하여 승리를 거둔 것이다. 이 과정에서 해군을 조직하고 살라미스 해전의 승리를 이끈 아테네는 그리스 폴리스의 맹주로 등극하여 페르시아의 침공을 대비한 델로스 동맹의 기금을 자신들의 도시의 상징인 아크로폴리스의 재건에 사용한다. 막대한 자본과 승리에 대한 도취감은 위대한 예술을 만드는 중요한 자원이 된다.

<페리클레스의 시대>, 필립 폰 폴츠(Philipp von Foltz), 1852


승리의 원인

이후 역사학자들은 그리스의 위대한 승리를 그들의 지정학적 위치에서 찾았다. 헬라스인들은 험준한 산지에 자리 잡았다. 그들은 거대한 도시를 만들만한 넓은 평지가 없었다. 곳곳에 위치한 얼마간의 평지에 자리를 잡고 그 크기에 맞는 폴리스를 키워갔다. 땅이 비옥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바닷가를 위주로 도시를 건설하여 중개무역을 위주로 경제적 이익을 취했다. 충분한 일조량은 소금을 만들거나 올리브기름을 만들기에 적합했고, 식량의 상당 부분은 무역을 통해 조달할 수 있었다. 그들에게 항해는 생존을 위해 필수적이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에서 함대를 파견하거나 표류하는 것은 그리스인들의
바다에 대한 도전과 두려움을 반영한 것이다.

그들은 험준한 산지 때문에 하나로 조직된 거대한 제국을 건설할 수 없었고, 잦은 폴리스 간의 다툼 때문에 전쟁이 빈번했다. 경쟁은 한정된 자원의 효율적이고 창의적인 사용을 강제한다. 다양한 크기의 폴리스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자신들의 생존에 도전했다. 다른 폴리스들과 연합하고 경쟁하며
다양한 전술과 사고의 유연성을 얻을 수 있었다.

그들의 승리의 원인을 경쟁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경쟁이 기존의 사고에 의문을 갖고 질문하게 하며 새로운 방법을 고안하고 보다 적합한 방법을 찾아내게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들의 철학과 예술의 원동력이 되었고, 그들이 만든 문화는 이후 로마의 지배시기에도 꿋꿋이 살아남아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것을 증명했다.


시작되는 각성 ("보이는 대로")

<장기를 두는 아킬레우스와 아이아스>, 기원전 540년

아킬레우스와 아이아스의 눈을 보면 고대이집트의 미술에서 드러나는 '정면성의 원리'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왼편에 있는 아킬레우스의 왼팔은 거의 숨겨져 있으며, 두 인물의 가슴은 정면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아래 장기판을 중심으로 오른편의 아이아스의 창은 장기판의 전면에 위치하고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다. 한편 아킬레우스의 창은 장기판 뒤편에 위치하고 있음을 끊어진 선을 통해 알 수 있다. 여기서 드러나는
깊이감은 이전의 이집트미술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변화이다. 두 인물 주변을 떠다니는 글씨는 이 인물들이 누구인지를 드러내고 있다. 이집트 미술에서 그림과 글이 한 도판에 위치한 것과 다르지 않다. 다시 말해 인물에 대한 설명을 해야 한다는 것은 그림 자체로 인물을 설명하는 도상학이 등장하지 않았다. 창과 갑옷만으로는 인물들의 '영혼'을 드러낼 수 없다.

<전사의 작별>, 기원전 510-500년

<전사의 작별>, 기원전 510-500년

가운데 위치한 전사의 다리를 보면 한쪽 다리는 이집트의 미술과 같이 옆모습을 표현하고 있지만 다른 한쪽 다리는 정면을 그리고 있다. 발을 정면으로 그리면 발의 특징인 길이를 표현할 수 없고 또한 저것이 코끼리의 발처럼 발톱이 발에 박혀있는지 아닌지 혼란을 겪을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이집트인들은 단축법을 쓰지 않았다. 그들은 프랑켄슈타인과 같이 조각난 신체를 붙여놓듯 신체를 재조합했다. 하지만 아르카익의 그리스 화병에는 "눈에 보이는 대로" 신체를 표현한 흔적이 발견되었다.

"보이는 대로" 그리는 것은 "관찰"을 요구한다. 관찰은 개개인의 역량과 관심에 따라 다른 결과를 불러온다. 능력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관심에 따른다는 것은 흥미롭다. 관심을 뜻하는 영어 interest는 라틴어 interesse에서 파생된 단어로 inter (~사이에) + esse (존재하다)의 합성으로 '참여하다'라는 뜻을 가진다. 그리스의 민주주의의 덕목은 '참여'에 있다.

그들의 '단축법'과 '원근법'은 중세를 거치며 상실되며 르네상스에 이르러 재획득된다.

<누워있는 여인의 측정>, 알브레히트 뒤러, 1525

예술은 그리고자 하는 '의지'와 '능력'에 따라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발전한다. 또한 무엇을 그리고자 하는지에 따라 전혀 달라진다. 그들이 그리고자 하는 것이 눈에 보이는 그대로라면 르네상스 예술가들이 발명한 투시도법은 완성된 무기일 수 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대로 그려진 것은 단지 "내 눈에 보이는 것" 일 뿐이다.

이것은 플라톤이 미술을 비판, 나아가 비난하는 이유가 된다. 회화는 한순간, 한 시점에 눈앞에 드러난 그림자와 다르지 않다. 플라톤은 우리의 육체가 머무는 곳을 이데아의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했다.
결국 "보이는 대로" 그린 것은 사물의 그림자일 뿐이다.


자연스럽게!

경직된 사회구조는 경직된 미술로 표현되었다. 이집트미술은 그것을 보여주었다. 아르카익 시대를 지나며
그리스의 조각은 삐딱한 자세를 취하게 된다. 한때 이 삐딱한 자세는 건방지다는 평가를 받는 '짝다리'이다. '짝다리'를 짚는 것은 때론 편하다. 사람이 두 다리에 균등한 무게를 두고 서있는 것은 올바르지만 꽤나
지속하기 피곤하다. 균형은 완전한 대칭적 상태 (symmetry)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무게중심이 가운데에 있다면 이미 약간의 변형 역시 자연스럽다.

콘트라포스토 (contrapposto)

위대한 짝다리는 그 아름다운 <밀로의 비너스>와 2000천여 년을 지나 등장한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에서도 등장한다.


위대한 나체

고대그리스의 미술이 이집트미술과 구분되는 또 하나의 특징은 그들이 나체를 주로 그렸다는 점이다. 그들이 나체를 그렸던 것은 '육체'에 대한 가치를 높게 평가한다는 증거이다. 보다 유물론적인 설명을 해보자면

경쟁적 상황에 놓인 고대그리스인들은 실제 전투를 치르는 것을 줄이는 방법으로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충분히 그러한 효과를 발휘한 "올림피아 제전"이다. 폴리스의 단합과 화합을 목적으로 했다고는 하나 위대한 챔피언이 있는 도시는 강함의 상징이 되고 인기 있는 스포츠 스타가 있는 도시는 여타 폴리스인들의 사랑을

방패로 삼을 수도 있었을지도 모른다. 확실한 것은 올림피아 제전이 열린 도시들에서는
길쭉한 평면을 가진 터가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올림피아의 중앙에는 제우스신전이 위치하고 이곳에서 올림피아의 승리자는 거대 제우스상 앞에서 월계관 수여식을 치르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 왼쪽 윗편에 있는 길쭉한 건물은 gymnasium으로 지금은 체육관을 의미하는 장소이다. 이 건물의 어원은 gymnos로 나체를 뜻한다. 이곳에서 참가자들은 자신의 육체미를 뽐냈으며 온몸에 올리브유를 발라 번쩍거리는 구릿빛의 근육을 과시했다. 오른편의 길쭉한 곳은 육상 경기를 하던 곳으로 기준이 되는 두 선의 간격이 1 stadion이며 이것은 지금 기준으로 192.27m이다. 이것이 주 경기장을 뜻하는 stadium 이 되었다. 폴리스에 따라 마차 경기장이 있는 경우도 있다. 말을 뜻하는 hippo를 붙여 Hippodromos라고 부른다. 우리가 아는 hippo는 강의 말이라는 의미이지만 그리스어로는 말을 뜻하고 dromos는 drum과 같은 원형의 공간을 의미한다.

그리스인들의 나체 표현은 그들이 처한 경쟁적 상황과 깊은 관계가 있으며, 공동체에 기여도가 높은 스포츠 참가자인 남성이 여성보다 정치적 권리가 커진 것을 설명할 수 있다. 고대그리스에서 참정권은 군역을 지는 성인 남성에게만 주어졌다. 그들이 공동체를 지키는 방법은 신체를 단련하고 기술을 익히는 것이었다. 아름다움의 상징인 구릿빛 피부는 고대그리스인들의 계급을 상징하는 것으로 부유한 그리스 시민은 노예에게 일을 시키고 자신은 땡볕에서 신체를 단련한 결과이다. 허여멀건 피부의 남성은 백면서생 취급을 받을 수밖에 없다. 로마의 시인 유베날리스 (Juvenalis)는 유명한 격언을 남겼다.

<mens sana in corpore sano>

(건강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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