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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mo ludens Mar 27. 2024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 4장

아름다움의 세계 - 기원전 4세기부터 기원후 1세기까지 - 조각

고대그리스 미술의 클래식 시기는 자연에 대한 관찰을 통한 묘사의 정밀성을 기술적 숙련으로 성취한 것과 인체 묘사의 자연스러움을 위한 몇 가지 기법을 터득한 위대한 각성의 시기였다. 이어지는 헬레니즘 시기는 그리스의 세계관이 에게해에만 갇혀있지 않고 동방의 아나톨리아를 거쳐 인도까지 확장되게 된다. 그들은 육체의 아름다움을 통해 자신의 폴리스의 강성함을 과시하는 것에서 벗어나 인간이 가진 복잡한 감정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신화 속 이야기에서 다양한 "아름다움"의 가치를 재발견하고 육체와 영혼의 아름다움을 동시에 표현하는 수준에 이르게 된다.


자연스러움과 운동성

그리스의 조각은 이집트 조각의 경직된 표현을 극복하고 콘트라포스토 (contrapposto)를 통해 자연스러운 상하반신의 구성의 가능성을 열었다. 다만 자유를 얻는 다른 신체 부위의 처리는 또 다른 문제를 유발하는데 다양한 포즈의 연출에 따라 구조적 취약성을 피할 수 없었다.

<밀로의 비너스> 기원전 130-100년경

<밀로의 비너스>의 두 팔이 있었다면 어떤 모습일까? 과연 그 모습은 팔이 없는 그녀보다 우리에게 더욱 아름답게 다가올 수 있을까? 조각가들에게 두 팔의 처리는 구조적 취약함이라는 과제뿐 아니라 자연스럽고 적절하게 위치시킬 수 있는 방법에 대한 또 다른 고민을 주었다. 육체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비너스의 모습은 상반신을 그대로 노출하면서 각 부위 사이의 비례의 적절함을 과시한다. 하반신은 주름이 흘러내리는 옷으로 가려져 전체적인 상하반신의 비례에 보다 집중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또한 옷의 흐름과 주름은 콘트라포스토를 통해 틀어진 중심에 의해 만들어지는 중력이 몸을 따라 흐르는 모양을 드러내도록 한다.

위의 두 <승리의 여신> 조각은 엄청난 운동감을 보여준다. 왼편의 <사모트라케의 니케아>는 잘린 팔이 돌진하는 그녀의 승리에 대한 확신을 조금도 저해하지 않는다. 오른편의 칼리마코스의 니케아는 부유하는 듯한 승리의 여신을 날개와 다리의 부재로도 완벽히 표현했다.


미완의 완성

그리스의 조각들은 수많은 파손의 시기를 겪었다. 그 가운데 <벨베데레의 토르소>는 미켈란젤로에게 강력한 영감을 주었다. 다리도 얼굴도 팔도 없는 토르소의 잔해는 그의 조각을 되돌아보는 계기를 마련했고, 생기 없는 자신의 조각에 꿈틀거리는 생명력을 부여하는 방법을 일깨워주었다.

상체와 하체의 꼬임은 응축된 힘을 가시화할 수 있었고 단순한 신체의 표현에서 다양한 자세들의 창조의 열쇠로 다양한 작품에 영향을 주었다.

최후의 심판의 가운데 부분에 위치한 사다리를 들고 있는 인물과 사람가죽을 들고 있는 인물들은 꼬인 상하체의 움직임을 통해 획일적인 자세에서 쉽게 벗어날 수 있었다.


영혼을 그려내기

아르카익의 미소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은 웃는 동물'이라는 것에 착안한다면 그리스의 조각이 동물의 단계에서 인간의 단계로 진화한 중요한 도약이다. 단순히 십여 가지의 근육의 움직임으로는 다양한 표정을 구현하기는 불가능하다. 인간의 얼굴 근육은 크게는 80가지의 조각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를 통해 7000여 가지의 표정을 지을 수 있다고 한다. 이러한 얼굴 표정의 미세한 묘사는 인간이 가진 복잡한 감정을 표현하는데 아주 적합하다. 다만 어떤 표정에 어떤 감정을 대응시킬지는 복잡한 감정일수록 공감대를 얻어내기 힘들다.

복잡 다난한 감정일수록 인간이 처한 운명적 상황을 드러낼 수 있을 텐데 그것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 <라오콘 군상>이다. 망실되었던 이 작품은 1506년 로마의 산타 마리아 마죠레 성당 인근의 포도밭에서 발견되었다. 안토니오 다 상갈로는 미켈란젤로에게 감정을 부탁했고, 고대 그리스 조각의 전문가인 그에 의해 인증된 이 작품은 교황 율리오 2세에 의해 바티칸에 소장되어 대중에게 공개되었다.

작품의 내용은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 언급되는 내용이다. 트로이는 자신의 성을 침입하려는 오디세우스의 지략에 그들이 남겨놓은 목마를 들이려 한다. 이를 알아차린 트로이의 신관 라오콘이 이를 발설하려 하자 스파르타를 응원하던 포세이돈이 물뱀을 보내어 그와 그의 아들들을 죽이는 장면이다. 죽음을 맞이하는 라오콘의 감정은 한 개인의 죽음에 대한 공포에 그치지 않는다. 자신의 죽음이 공동체 전체의 죽음, 도시의 멸망으로 이어지는 끔찍한 운명에 한탄한다. 그의 감정은 단순한 두려움으로 수렴되는 것이 아니다. 육체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공동체 전체를 근심하는 위대하고 "차분한 영혼"이 드러난 곳이 그의 얼굴이다. 소크라테스는 눈을 '마음의 창'이라고 했다. 만약 이 작품에 눈이 그려졌다면 우리는 이 대리석 조각을 눈물 없이 마주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라오콘 군상>, 아게산드로스, 아테노도로스, 폴리도로스 합작, 기원전 100년경
라오콘 군상은 다른 모든 업적들 이외에도 대칭성과 다양성, 고요함과 운동성, 대립과 점층이 감상자에게 부분적으로는 감각적으로 부분적으로는 정신적으로 드러난다. 상상력의 높은 격정 상태에서 편안한 감각으로 인도하고 우아함과 아름다움으로 고통과 격정의 현기증을 잠재운다.

괴테는 라오콘 군상이 표현적으로 상반된 두 가지 성격을 드러낸다고 보았다. 대칭성인 symmetry는 완벽한 대칭을 통한 단순성을 뜻하는데 라오콘 군상은 적절한 대칭성 (두 아들)에 뒤틀린 라오콘을 중심에 두고 다양성을 취했다고 보았는지도 모른다. 역동적인 인물의 육체는 고통과 격정에 몸무림 치지만 그의 표정에 비치는 감정은 피하고자 하는 고통에만 국한된 것은 아닌 듯하다.

요한 요아힘 빙켈만은 이 작품을 통해 "고귀한 단순함과 고요한 위대함"을 그리스 걸작의 보편적 탁월함이라 주장했고 "모든 격정 속에서 위대하고 차분한 영혼"을 그려내는 일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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