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만들어낸 관념의 지옥

정소현, 「지옥의 형태」, 『품위 있는 삶』. 파주: 창비.

by 노창희

“나는 1975년 겨울에 태어나 2015년 늦여름에 죽었다(96쪽).”로 시작되는 「지옥의 형태」는 화자인 ‘나’가 진짜로 사후 체험을 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을 갖게 한다. 소설을 읽어 나가다 보면 정확한 정보를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나는 사후 체험을 하고 있다기보다는 정신 질환을 겪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화자인 나는 「어제의 일들」의 율희와 포개져 있다. 율희와 완전히 상황적 맥락이 같지는 않더라도 거의 유사하며, 「어제의 일들」에서 율희가 왜 그런 식으로 행동했는지 이해할 수 있는 정황적, 심리적 상황들이 이 단편에 포함되어 있다.


삼 남매 중 둘째인 나는 어린 시절 다른 형제들보다 부모의 관심을 덜 받은 것에 대한 트라우마를 겪고 있다. 이러한 트라우마는 나가 다른 사람들과 정상적인 인간관계를 맺기 어렵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나는 끊임없이 타인의 마음을 오해하고, 타인이 자신에게 위해를 주는 행위를 하고 있다고 자각하면 그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을 하며 자신을 달랜다. 나는 자기가 이러한 상황에 처한 것이 결국 자신이 만들어 낸 지옥에 자신이 갖혔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내가 지옥을 살게 된 것은 내 마음의 불안과 고독, 두려움, 이런 부정적인 감정들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121쪽).”


나가 자신이 느끼는 불안과 고독과 같은 감정 때문에 스스로 지옥을 살고 있고, 이것이 사후 체험이 아니라 정신질환이라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지옥의 형태」의 나가 느끼는 삶에 대한 감각은 「어제의 일들」에서 상현이 느끼는 삶의 감각과 대비를 이룬다. 나가 삶의 제반 조건에 별다른 어려움이 없는 상태에서 그것을 잃을까 두려워 발버둥 치며, 타인의 행복과 나의 행복을 가늠하느라 지옥에서 산다면 상현은 극한으로 내몰린 상황에서도 살아 있어서 다행이라고 느낀다.


이렇게 본다면 「지옥의 형태」에서 나는 물리적으로 살아 있다고 하더라도 본인이 느끼는 것처럼 2015년 늦여름에 죽은 것이 맞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2015년 늦여름에 자신의 스스로 지옥 속으로 들어갔으며 거기서 빠져나올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을 자각한 것이다. 인간은 자연적으로 태어나지만 살아가면서 관념적으로 현존한다.


오민석은 자신의 시집 『굿모닝, 에브리원』 책 뒷면(이 문단에 따옴표로 인용되어 있는 문장은 모두 오민석의 글을 인용한 것이다)에 “지각이란, 견딜 수 없는 주체가 견딜 수 없는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라고 적고 있다. 다시 오민석의 글을 빌리면 여기에서의 세계란 “‘당연한(natural)’것이 아니라 ‘구성된(constructed)’”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민석이 “사자의 정신”이라고 표현한 존엄한 인간성은 “오로지 세계의 복잡성을 인내하며 그것과 고통스럽게 분투한 존재”에게만 주어진다.


『품위 있는 삶』에 수록된 「어제의 일들」과 「지옥의 형태」는 비틀려진 데칼코마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삶에 대한 태도는 결코 단순하게 대조될 수 없다. 하지만 끊임없이 타인을 의식하며 불안 속에서 사는 인간이 지니는 삶의 태도와 인정 욕구가 아닌 자신의 삶을 온전히 지켜나가고자 하는 이가 사는 삶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똑같이 고통스러운 삶이라면 후자 쪽을 택해야 한다는 것 역시 너무 자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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