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블이 느끼는 하향적 수치침이 전해주는 희망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선물」을 신형철의 하향적 수치심을 적용하여 읽기

by 노창희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Elizabeth Strout)의 단편집 『무엇이든 가능하다』(정연희 역, 파주: 문학동네)에 실린 단편 「선물」의 주인공 에이블 블레인은 성공한 사업가다. 에이블은 크리스마스에 손녀 소피아를 데리고「크리스마스 캐롤」을 보러 간다. 거기서 작은 사건이 일어나게 되는데 조명이 잠시 꺼진 일이 그것이다. 아마도 그 때문일 텐데 소피아는 가져갔던 조랑말 인형을 공연장에 두고 오고 에이블은 조랑말을 찾으로 공연장으로 다시 간다. 거기서 스크루지 역을 맡았던 링크 매켄지를 만나게 된다. 에이블은 스크루지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손녀의 조랑말 인형을 찾을 수 없는 상황. 깐깐한 스크루지는 조랑말 인형을 찾기 위해서는 자신의 말을 좀 들어야만 한다고 버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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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옷을 입고 있는 에이블에게 링크 매켄지는 비싼 옷을 입었으니 부자일 것이라고 시작하여 에이블을 조롱하는 듯한 말을 늘어 놓는다. 누구라도 짜증날 수밖에 없는 상황. 하지만 에이블은 과거를 회상하며 수치심을 느낀다. 에이블이 느끼는 수치심은 죄책감과 관련되어있다. 가난했던 시절 에이블은 좋은 옷을 입지 못했다. 아니 제대로 입을 옷이 없었다. 하지만 부자가 된 이후에는 키스라는 재단사를 통해 옷을 맞춰 입었다. 그런데 에이블은 키스가 급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하자 수치심을 느끼고 자신은 그 수치심의 원인을 제대로 규명해 내지 못한다.

계간지 『문학동네』 가을호(100호)에 실린 신형철의 평론 「정치적 수시침의 발명: 감정의 윤리학을 위한 서설2」에는 에이블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가 담겨 있다. 신형철은 황정은의 「양의 미래」를 언급하면서 수치심의 종류를 두 가지로 나눈다. “순전한 모욕감으로서의 수치심(수치심1)과 죄책감에서 이어지는 수치심(수치심2),(518쪽)”이 그것이다. 신형철은 봉준호의 <기생충>을 통해 죄책감 때문에 느끼는 수치심에 대한 논의를 계급적 논의로 확장시킨다. 하층 계급이 어쩔 수 없이 느낄 수밖에 없는 수치심 즉, 상향적 수치심이 아닌 고용인 없이는 “‘짜파구리’ 하나 끓일 수 없는 무능력(531쪽)”에 대한 하향적 수치심은 계급사회에는 찾기 힘들다는 것이다(신형철은 “하향적 수치심이 존재하지 않는다(531쪽)”고 썼다. 나는 이를 찾기 힘들다고 바꾸어 쓴다).


다시 「선물」로 돌아봐 보자. 신형철의 수치심에 대한 분석을 참고하면 에이블이 느끼는 수치심은 ‘하향적 수치심’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에이블에게 이 감수성이 가능한 이유는 그가 유년 시절에 겪었던 하층 계급이기 때문에 느껴야 하는 수치심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민박집을 운영하며 어렵게 살아가는 동생 도티에게 본인이 특별히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다는 죄책감도 에이블이 느끼는 수치심의 원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보수당 지지자로 투표하면서, 이사회로부터 연간 보너스를 받으면서,
시카고의 가장 좋은 레스토랑에서 식사하면서, 그의 대부분이 오랜 세월
생각해왔던 것, 즉 내가 부자라는 사실에 대해 사과하지 않을 거야,
라는 말을 되뇌면서도, 그는 사과했다. 하지만 그 대상이 정확히 누구인지 그는
알지 못했다. 갑자기 수치심이 파도처럼 그를 덮쳐왔다(342쪽).


에이블은 그 대상을 모르지 않는다. 가난했던 과거의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고 싶지 않은 것 뿐이리라. 하지만 과거의 기억은 지금은 존재하지 않지만 마치 존재하는 것처럼 옆에 있는 환각지처럼 그를 종종 덥친다. “에이블에게 삶이 수수께끼인 부분은, 사람들은 많은 것을 잊어버린 후에도 그것을 지닌 채 살아간다는 사실이었다-환각지(幻覺肢)같은 거라고, 그는 생각했다(335쪽).”


상실과 체념의 정조가 가득한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단편집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호퍼의 그림 같이 느껴지기도 한다(실제로 「금 간」에서는 호퍼의 그림이 배경으로 등장하기도 한다).「선물」의 마지막 문장이자 이 단편집 전체의 마지막 문장이고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누구에게나 무엇이든 가능”하기 위해서는 에이블이 느꼈던 하향적 수치심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스트라우트는 말하는 것 같다. 이 단편집이 전달하는 희망의 정조는 바로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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