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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움직이는 것은 무엇인가—마르크스 입문과 비판

by 사회철학에서 묻다

1. 서론

“마르크스”, “자본론”은 20세기 공산주의와 민주주의라는 이념의 전쟁을 생생하게 경험한 대한민국에서는 “타부”였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발발한 한국전쟁은 남한 사회에 북한에 대한 깊은 증오와 상처를 남겼다. 남한에서 정권을 잡은 정치인들은 민주주의 수호라는 명목하에 독재를 시행했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등은 북한이라는 외부의 적을 상정해 두고 자신들의 불법적인 탄압을 정당화했다. 자신들에게 반대하는 모든 세력과 목소리는 빨갱이, 반동분자, 북한의 앞잡이로 몰아세웠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 “마르크스”와 “자본론”은 당연히 배척당하고 왜곡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대한민국에 어리고 미숙하지만 민주주의가 자리 잡으면서 “마르크스”와 “자본론”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향한 목소리가 큰 힘을 얻고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에 뿌리 깊게 자리 잡은 이념의 흔적은 쉽게 지워지지 않고, 그 관성의 힘 또한 거스르기 힘들다. 여전히 “마르크스”와 “자본론”에 대한 불합리한 평가가 주를 이루고 있다. 이는 이념의 흔적이나 관성뿐만 아니라 마르크스의 책 “자본론”이 매우 어렵게 쓰인 책이라는 점도 큰 영향을 미친다. 또한 “자본론”과 “마르크스의 과학적 유물론”은 우리가 진리라고 믿고 편히 기대어 살고 있는 자본주의의 종말을 고한다는 사실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영향일 것이다.


따라서, 마르크스의 철학을 쉽게 풀어쓴 “원숭이도 이해하는 마르크스 철학”은 그 자체로 큰 의미를 지닌다. 물론 쉬운 이해가 우선적이기에 대화 형식으로 쓰여 있고 많은 부분이 삭제되긴 했지만, 마르크스 철학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기에 충분한 깊이라고 생각한다. 앎과 이해는 모든 관심에 선행하는 바, 쉬운 해설서는 깊은 관심에 이르는 길을 제공한다. 따라서, “원숭이도 이해하는 마르크스 철학”으로 깊은 사유를 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것은 매우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2. 관념론과 유물론

관념론과 유물론은 서양 철학을 지탱해 온 두 가지 주요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둘 다 “세계의 근원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는 철학 사조이다.


관념론은 세상의 근원은 정신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유물론은 세상의 근원은 물질이라고 주장한다. 관념론의 뿌리는 플라톤의 “이데아론”에서 찾아볼 수 있다. 플라톤은 세상의 근원을 이데아라고 주장했다. 현실 세계는 이데아의 그림자일 뿐이고, 인간의 영혼이 체험하는 이데아야말로 진짜라는 말이다. 이는 후에 기독교적 사상으로 변화된다. 기독교적 사상에서는 이데아가 신으로 대체된다. 신이 인간과 세상을 창조했기 때문에 세상의 근원은 신이라고 주장한다.


반면에 유물론이 생각하는 세상의 근원은 물질이다. 번개가 치는 이유는 신이 분노해서가 아니라, 구름과 대지 사이의 방전 현상 즉 물리적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유물론적 세계관은 과학적 세계관으로 발전했다. 과학적 세계관은 세상의 이치를 사변적으로 바라보기보다 특정 현상의 원인, 즉 설명 가능한 물질을 발견하려고 한다.


관념론은 특정 현상에 대한 물리적 근거를 찾지 않기에, 관념을 지배할 수 있는 지배층이 권력 유지에 활용할 수 있다. 왕은 신으로부터 권력을 부여받은 존재이기에 백성을 다스릴 권리를 가진다. 종교는 이 세상의 창조주인 신으로부터 권력을 부여받았기에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한다. 이러한 관념은 증거가 아니라 이념이나 사상으로 교육되기 때문에, 교육과 공권력을 가진 권력자들이 이를 이용하기 용이하다. 교육을 통해 자신들의 존재를 정당화하고, 자신들에게 반기를 드는 자들을 공권력으로 처단하면서 특정 행동과 생각을 학습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유물론은 변화를 가능하게 한다. 유물론은 특정 사실에 대한 물리적 원인을 찾으려 노력한다. 이 때문에 발견된 새로운 진리들은 이전 권력자들의 권력을 부정할 힘이 되기도 한다. 또한 이러한 태도는 사람들이 기존 개념을 지키는 데 힘쓰기보다 새로운 사실을 찾아내는 데 더 큰 노력을 기울이도록 하여, 사회 발전의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3. 형이상학과 변증법

변증법은 “마르크스”의 이론을 설명하는 데 필수적인 개념이다. 변증법을 이해하기 전에 형이상학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형이상학이란 세상에 변하지 않는 진리를 찾으려는 세계관이다. 이는 세상이 고정불변의 틀을 끊임없이 반복한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변증법은 세상의 변화를 설명하는 세계관이다. 세상에는 정해진 틀이 없고, 세상 자체가 “정-반-합”을 통해 발전한다고 주장한다.


형이상학적 세계관에서 ‘모순’은 부정적 의미를 지닌다. 세상이 고정불변의 틀 안에 있는데, 모순이 생긴다는 것은 우리가 파악한 고정불변의 틀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모순을 해결하려 하기보다, 그 틀을 다시 해석하려는 노력으로 우리를 이끈다. 반면에 변증법에서 모순은 발전에 선행하는 필수적 요소다.


변증법 철학은 독일의 철학자 헤겔의 학문적 성과다. 그는 노예와 주인의 변증법을 통해, 모순적으로 보이는 두 객체가 서로 어떻게 상호의존하고 발전하는지를 보여준다. 사회에서 목숨을 건 투쟁을 통해 승리한 자는 주인이 되고, 패배한 자는 노예가 된다. 주인은 승리의 대가로 노예를 소유하고 그들의 노동력을 착취하며 독립성과 자율성을 유지한다. 하지만 주인은 노예의 인정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노예의 노동력에 의존하는 예속적 관계에 놓이게 된다.


반면에 투쟁에서 패배한 노예는 주인의 명령에 따라 노동을 하며, 세상의 물질세계를 변화시키고 주도적으로 생산하며 자아를 발전시킨다. 노예의 노동은 자신과 세계를 발전시키면서 더욱 성장해 간다. 이러한 관계 속에서 성장한 노예는 모순을 견디지 못하고 투쟁을 벌이며, 투쟁에 승리하면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나간다.


이처럼 모순은 변화를 이끈다. 노예와 주인은 모순적 관계다. 주인은 노예를 착취하면서 안주하는 반면, 노예는 착취당하면서 발전한다. 모순은 노예가 주인에 맞설 힘을 주고, 그로 인해 노예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낸다. 따라서 변증법적 세계관에서 모순은 변화의 전제 조건인 셈이다.


4. 변증법의 기본 법칙

변증법은

a.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의 법칙

b. 양적 변화의 질적 변화로의 이행의 법칙

c. “부정의 부정”의 법칙

이라는 변화를 위한 3대 법칙을 가지고 있다.


먼저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의 법칙’이란, 변화를 위해서는 대립할 수 있는 두 가지 물질(혹은 요소)이 통일적으로 존재하여 계속적인 모순 관계를 형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노예와 주인은 대립물로서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며 대립한다. 만약 모든 주인이 노예를 떠나버린다면, 그 순간 모순은 사라지고 변화 역시 일어나지 않는다.


둘째, ‘양적 변화의 질적 변화로의 이행의 법칙’이란 모순으로 인해 발생한 특정한 에너지가 양적으로 쌓이다가 임계점을 넘는 순간 질적인 변화를 동반한다는 법칙이다. 투쟁이 끝나고 주인이 노예를 착취하는 세상에서, 노예는 주인에게 분노를 느낀다. 하지만 분노 자체가 곧바로 변화를 주도하지는 않는다. 어떤 노예는 분노를 느끼면서도 순응하거나, 거부할 수 없는 주인의 힘에 분노를 억누르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분노의 에너지가 양적으로 계속 쌓이면 특정 시점에 폭발해 혁명으로 이어진다. 이것이 노예들이 만들어낸 새로운 세상이라는 질적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부정의 부정”의 법칙은 변증법의 변화가 전혀 새로운 존재를 탄생시키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모두 역사에 영향을 받는 존재이기 때문에, 변증법은 과거의 악습을 어느 정도 포함하는 범위 안에서 변화를 생산한다고 본다. 예컨대 봉건제를 타파한 상인 계급들은 상인들에게 유리한 경제제도를 형성했으나, 봉건제의 악습이었던 ‘지배계급의 착취’ 자체는 답습하는 식이다. 그러나 변증법은 모순이 존재한다면 끊임없는 변화를 약속하기 때문에, 결국 과거의 악습을 차츰 해결하면서 더 나은 세상으로 나아간다고 본다.


5. 헤겔, 포이어바흐, 마르크스

헤겔은 관념론적 변증법, 포이어바흐는 유물론적 형이상학, 그리고 마르크스는 유물론적 변증법을 주장했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헤겔의 변증법은 거꾸로 서 있는 변증법이고, 포이어바흐의 사상은 변화를 부정했다.


헤겔은 세상이 끊임없이 변화한다고 보는 변증법적 세계관을 제시했지만, 이 변화는 ‘절대정신’이라는 관념으로 설명하려 했다. 세상의 변화는 인간이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절대정신이라는 관념이 자신을 실현해 나가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절대정신이라는 작가가 쓴 연극의 배우일 뿐이다. 자연의 법칙 또한 마찬가지다. 중력의 법칙이 있기 때문에 물체가 서로를 끌어당기는 것이 아니라, 절대정신의 의지에 의해 중력이 발생한다는 식이다. 마르크스는 이를 세상을 뒤집어 해석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포이어바흐는 저서 “기독교의 본질”에서 종교란 인간이 만든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면서 종교적 관념론을 통렬히 비판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설명되지 않는 사회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종교를 만들었다. 신의 모습이 인간을 닮은 것은 인간이 신을 창조했다는 증거라는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입장에서 포이어바흐의 사상은 형이상학적이다. 왜냐하면, 포이어바흐는 “기독교의 본질”을 통해 세상의 법칙을 밝히려고 했는데, 이는 기독교가 고정불변의 진리라고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기독교가 특정 사회, 즉 서구의 시대적 상황만 반영할 뿐이므로 이를 일반 법칙으로 삼는 것은 형이상학적이라고 보았다.


마르크스는 ‘세상은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변증법을 헤겔로부터 계승했고, ‘세상의 변화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유물론적(과학적) 관점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포이어바흐의 사상을 이어받았다. 그리고 결국 유물론적 변증법을 주장하게 되었다.


6. 역사 유물론

역사 유물론은


“지금까지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다.”

라는 문장으로 대표되는 마르크스의 중요한 지적 유산이다. 여기서 말하는 계급이란 노예, 주인, 노동자계급, 자본가계급과 같은 계급을 말한다. 경제로 세상을 분석한 인물답게, 마르크스는 생산수단의 소유 여부로 계급을 나눈다. 그의 철학에서 지배계급은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피지배계급은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한다. 변증법적 관점으로 보면, “세상은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간의 모순으로 이루어져 있고, 이 모순은 변화를 유발한다”라고 설명할 수 있다.


또 다른 대표 문장으로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

라는 말이 있다. 세상에 존재하는 개인은 각자 주관성을 가지고 있고, 주관성을 가진 개인들의 총합을 사회라고 할 때, 마르크스가 말하는 ‘법칙’으로 세상을 설명하는 데 한계가 있을 수 있다. 왜냐하면 법칙은 특정 원인에 대해 동일한 반응을 전제하기 마련인데, 주관성은 이를 불가능하게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유물론적 전제에 따르면, 인간은 생명을 유지하려는 공통된 성질이 있고, 이를 위해 의식주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사회가 의식주의 해결을 위해 특정 행동을 요구한다면, 인간은 그 요구에 따라 행동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예컨대 마을의 오른쪽에 우물이 있다면, 인간은 목이 마를 때 자연스럽게 오른쪽으로 향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결국 개인의 자아가 형성되는 데에는 존재(물질적 토대)가 결정적으로 작용한다.


이는 관념론적 역사관과 유물론적 역사관의 차이도 잘 보여준다. 관념론적 역사관은 역사의 변화를 ‘영웅’의 행동으로 설명한다. 예를 들어, 프랑스혁명은 로베스피에르, 당통, 나폴레옹 같은 영웅적 인물을 빼고는 설명할 수 없다고 본다. 하지만 유물론적 역사관은 이러한 인물들의 정신 역시 당대의 경제적·사회적 조건에 의해 형성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만약 위와 같은 인물들이 없었다 해도, 그 당시의 경제적 상황이 영웅의 정신을 낳은 것이므로 비슷한 역할을 할 다른 인물이 나타났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봉건사회에서 토지와 농노는 지주에게 매여 있었는데, 신흥 경제세력인 상공업자들은 공장을 지을 토지와 노동자들이 필요했다. 이러한 모순적 상황, 즉 ‘존재’가 변화의 필요성(의식)을 규정했고, 그 결과 영웅적 인물들의 정신이 형성된 것이다.


7. 생산력과 생산관계 그리고 모순

생산력 = 노동력 + 생산수단

생산관계 =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관계

마르크스는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이 사회 발전의 원동력이라고 주장했다. 모든 시대는 그 시대에 맞는 생산관계와 생산력을 갖는다. 예컨대 노예제 사회에서는 노예와 주인이라는 생산관계 하에서 노예 제도에 맞는 생산력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사회가 변화하면서 새로운 생산력을 가진 산업이 등장한다. 봉건제도에서는 농노와 지주라는 생산관계 아래 농업 위주의 생산력이 주를 이루었다. 그러나 기술 발전과 분업을 통한 효율성 향상으로 기계제 대공업이 등장하면서, 봉건제의 농업 생산력을 뛰어넘는 새로운 생산력이 등장했다. 이 새로운 생산력은 기존 봉건 생산관계와 충돌을 일으킨다. 지주들은 자신들이 가진 특권을 지키기 위해 부르주아계급과 대립하지만, 월등한 생산력을 지닌 부르주아계급은 지주들을 뛰어넘는다. 이 두 계급의 모순은 새로운 사회, 즉 자본주의 사회를 탄생시킨다. 다만 부르주아계급만으로는 봉건사회를 완전히 타파하기 어려웠기에, 부르주아는 자유와 권리라는 이념을 내세워 농노들을 유혹하고 자신의 혁명에 동참하게 만든다.


8. 자본주의의 모순

자본주의 사회는 이전 사회에서는 볼 수 없었던 빈부격차나 개인의 소외 같은 문제를 야기한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추구하는 효율을 통한 경제 발전은 사회 참여자 모두가 예전보다 더 잘 살 수 있다는 생각에 기반하여 성장해 왔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여러 차례 공황을 거치면서 스스로의 모순을 드러냈다. 공황이라는 거대한 재난 앞에 인간과 사회는 무력했고, 사람들은 고통에 신음했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공황은 ‘생산의 사회적 성격과 소유의 사적 성격 사이의 모순’에서 발생한다.


아담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분업의 중요성을 강조한 이래, 분업을 통한 효율성 추구는 자본주의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개념이 되었다. 오늘날의 세계화된 사회에서 분업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예컨대 미국 국적의 자동차 회사는 자동차 한 대를 만들기 위해 미국, 중국, 한국 등 다양한 나라의 노동자와 부품을 활용한다. 미국에서는 광고와 회계를, 한국에서는 자동차 배터리를, 중국에서는 자동차 바퀴를 만들고, 각국에서 완성된 부품을 조립해 자동차를 생산한다. 이런 분업 체계를 ‘생산의 사회적 성격’이라고 부른다.


문제는 소유의 성격이 다르다는 점이다. 자본주의는 사유재산을 중시하기 때문에, 생산수단은 사적으로 소유된다. 테슬라의 주인은 미국 정부가 아니라 테슬라 주주 개인들이다. 다른 기업들도 마찬가지다. 생산수단을 사적으로 소유한 자본가는 더 많은 이윤을 위해 끊임없이 생산을 확대하려 한다. 모든 기업이 생산량을 무한히 늘리면, 결국 사회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게 되고 공황이 발생한다. 따라서 마르크스는 이러한 모순을 통해 언젠가는 생산수단이 사회화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생산과 소유가 모두 사회적 성격을 띠게 된다면, 공황도 발생하지 않고 빈부격차도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9. 토대와 상부구조

마르크스는 사회를 토대와 상부구조로 나누었다.


토대: 그 사회의 생산관계의 총체

상부구조: 토대 위에 서 있는 정치적·도덕적·예술적·종교적·철학적 견해 및 그에 상응하는 제도·조직 등을 뜻한다. 즉 법이나 제도, 문화 같은 정신적인 것을 의미한다.

마르크스는 토대가 상부구조를 결정한다고 주장했다. 사회의 상부구조는 그 사회의 토대를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는 역할을 한다. 예컨대 자본주의는 사유재산 제도를 중시하는데,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부구조는 사유재산을 정당화한다. 헌법은 사유재산권을 기본권으로 규정하고, 여론은 사유재산을 신성시하며, 학교 교육 역시 사유재산권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상부구조가 토대에 의해 결정되는 이유는 간단하다.

첫째, 상부구조를 구성하는 사람들 또한 토대를 기반으로 생존해야 한다. 판사, 언론인, 교육자 등도 인간이기 때문에 생산품을 필요로 하며, 더 편한 삶을 위해서는 지배계급의 편에 서는 경우가 많다.

둘째, 사회에서 생산을 담당하는 지배계급의 힘은 막강하기 때문에, 정치권력을 잡으려면 토대(지배계급)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지배계급은 다른 정치 세력에게 권력을 넘겨줄 것이기 때문이다.

셋째, 상부구조를 구성하는 이들도 사회 구조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토대의 영향력으로 형성된 상부구조는 구성원들을 교육하고 세뇌하며, 이들은 그러한 가치관에 따라 행동하게 된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노동자는 노동 행위, 사회적 관계, 심지어 자기 자신으로부터까지 소외된다. 지배계급인 자본가는 이윤 극대화를 위해 노동자를 착취하면서 노동자들의 소외를 더욱 심화시킨다. 노동자들은 상부구조의 영향 아래 체제에 순응한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세상은 변화한다’는 변증법을 통해 노동자에게서 희망을 본다. 노동자에 대한 착취는 노동자들의 불만이라는 양적 변화를 낳고, 자본주의 사회의 과도한 경쟁은 많은 중소기업들을 도태시키면서 노동자를 증가시킨다. 이런 과정을 통해 불만이 쌓이면, 어느 순간 혁명이라는 계기를 통해 프롤레타리아 유토피아로 질적 변화를 일으킨다. 이 유토피아는 생산수단의 사회화를 통해 자본주의의 모순을 타파하고 노동자의 소외를 방지한다. 생존을 위해 ‘끌려다니는’ 노동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노동을 통해 사회는 더욱 인간적인 모습으로 변화할 수 있다. 본인들이 지배계급이라고 생각하는 부르주아계급조차, 사실은 자본에 끌려다니는 객체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들 또한 프롤레타리아 유토피아에서 더 쉽게 자아실현을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프롤레타리아 유토피아는 과학적 원리에 기반한 것이므로 우리가 도달해야 할 수밖에 없는 이상향이라고 마르크스는 주장한다.


10. 인간을 위한 철학을 표방하지만 인간을 망각한 마르크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에서 고통받는 인간을 위한 철학을 표방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철학을 들여다보면 오히려 인간이 망각된 철학이다.


먼저, 그의 역사적 유물론에서 인간은 사회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의 정신은 사회상, 특히 생산력과 생산구조에 따라 형성된다. 하지만 하이데거에 따르면 이는 인간의 실존성을 적절히 반영하지 못한다. 인간은 아무 이유 없이 세상에 ‘기투’된 존재다. 그들은 스스로의 궁극 목적을 정하고 궁극 목적에 따라 살아가게 된다. 인간이 정하는 궁극 목적은 세상의 ‘세인(世人)’들에 의해 결정되기도 하고, 본질적 삶에 따라 결정되기도 한다. 마르크스의 역사적 유물론은 왜 어떤 사람은 스스로 궁극 목적을 정해 세상이 정해 놓은 틀을 벗어나는 선택을 하는지에 대해 설명하지 못한다. 물론 사회가 주는 생산력과 생산구조라는 토대가 영향을 미치는 것은 사실이지만, 모든 인간이 동일하게 반응하지 않기에 인간의 반응, 즉 실존에 대한 논의는 중요하다. 이런 점에서 마르크스의 철학은 인간을 망각한 철학이다.


둘째, 마르크스는 변증법이 변화의 원동력이라고 주장했다. 변증법은 자극의 양적 변화가 이끄는 질적 변화를 말하는데, 이는 심각한 문제를 내포한다. 그의 과학적 유물론은 사회 변혁에 동반되는 인간의 희생을 당연시하는 경향이 있다. 역사는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고, 역사가 가는 길에 희생은 필연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 체제에서의 희생이 정당화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은 소중하고, 대의를 위해 희생되어도 되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그의 과학적 변화는 비인간적이다.


셋째, 마르크스가 꿈꾸는 프롤레타리아 유토피아는 점진적 공학보다는 과감한 혁명을 지향한다. 마르크스의 눈에는 자본주의가 모순을 내포하고 있을 뿐 아니라, 자본주의가 스스로 변화하기 위해 생성하는 작은 변화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 오히려 노동인권, 사회보장제도 등은 프롤레타리아 유토피아로 가는 길을 방해하는 장애물이 된다. 단결하고 변화에 힘써야 하는 노동자들이 눈앞에 던져진 ‘꿀’에 이끌려 체제를 유지하는 ‘일벌’에 머물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인간이 마르크스나 시대의 영웅처럼 장대한 시대정신을 갖고 있지는 않다. 그들은 지금 이 순간을 현재화하고 만족한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이러한 삶이 비본질적일 수는 있지만 그릇된 삶은 아니다. 마르크스는 자신처럼 장대한 시대정신과 의지력을 갖춘 사람들에게만 호의적이다. 따라서, 그의 철학은 모든 인간을 아우르지 못한다.


넷째, 바쿠닌은 “모든 권력은 부패한다”라고 했다. 인간은 이기적이기 때문에, 권력을 가진 자는 권력을 유지하기를 원하고 이는 부패로 이어진다. 따라서, 모든 권력은 견제가 필요하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과도기적 단계에 한해서이긴 하지만)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주장했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일어난 뒤에도 자본주의 잔재가 남아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이 시기를 넘기고 완벽한 프롤레타리아 유토피아에 도달하기 위해 독재가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는 인간이 가진 추악한 본성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는 주장일 뿐이다. 모든 인간은 불완전하므로 권력에 대한 견제가 반드시 필요하다. 실제로 소련, 중국, 북한 등의 공산주의를 표방한 국가들은 강력한 독재국가로 변모했고, 이는 살인, 고문, 세뇌 등 인류 역사에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마르크스의 철학은 인간을 이해하지 못한다.


11. ‘생산의 사회적 성격과 소유의 사적 성격 사이의 모순’의 모순

‘생산의 사회적 성격과 소유의 사적 성격 사이의 모순’은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의 한계를 설명함에 있어서 필수적인 개념이다. 하지만, 이 개념은 세 가지 큰 문제를 가지고 있다.


첫째, ‘생산의 사회적 성격’은 생산이 이루어지는 한에서만 참이다. 하지만 생산의 사회적 성격을 이끌어낸 근본 원인은 전적으로 ‘사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생산이 사회적 성격을 띠게 된 까닭은 이런 종류의 생산이 사적 이득, 즉 이익 극대화에 최적화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생산의 사회적 성격이 이익 극대화에 부정적이라면, 자본주의 사회는 망설임 없이 ‘생산의 사적 성격’으로 변모할 것이다. 필수적인 요소가 아니라 변동 가능한 요소를 통해 자본주의의 모순을 설명하려는 그의 시도는 매우 연약하다.


둘째, 오히려 소유의 사적 성격은 자본주의 발전에 필수적이다. 소유의 사적 성격이 없다면 우리가 누리는 경제 발전은 불가능하다. 어떤 방식이 경제 발전에 긍정적인지 아무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한 가지 방법에 올인하고 그것만 추구하는 경제정책의 결말은 불을 보듯 뻔하다. 실제로, 중국과 소련의 중앙집권적 경제체제는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혔다. 소유가 사적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기업인들은 자유롭게 여러 가지 방법을 시도해 볼 수 있다. 분명 100가지 시도된 방법 중 실패하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실패하고 도태되는 사업에 대한 책임은 국가가 지지 않고 기업들이 진다. 이는 사회가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빠르게 가장 최적화된 경제 발전 방법을 찾을 수 있게 한다.


셋째, 소유가 사회적 성격을 띠게 될 경우, 권력의 중앙 집중은 피할 수 없다. 중앙정부가 생산 수단을 독점하게 되면, 생산품의 분배는 중앙정부의 의지에 따라 이루어진다. 지방정부와 시민들은 중앙정부가 나누는 생산품에 의지하게 되기 때문에 중앙정부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눈치를 본다는 것은 중앙정부가 부정한 방법으로 권력을 취할 때나 권력을 남용할 때 적절히 제재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중앙정부가 생산수단을 독점하는 것은 프롤레타리아 유토피아가 아니라, 새로운 생산관계를 형성하게 된다(중앙정부 <지배계급> - 지방정부, 시민 <피지배계급>). 상부구조 또한 이러한 새로운 토대에 영향을 받아 이 토대를 정당화하는 이념과 교육, 그리고 법체계를 양산하고, 이는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지배계급의 피지배계급 착취로 이어질 것이다.


12. 결론

마르크스의 이론은 인간을 찾았다는 점, 그리고 우리가 믿어 의심치 않는 자본주의의 모순을 지적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노동자 착취의 세상에서 마르크스는 다른 누구도 아니고 노동자, 즉 프롤레타리아가 사회변화의 중심이자 미래의 주인이라고 선언하고 천명했다. 또한 그의 이론에 불안을 느낀 권력자들은 수정자본주의 등과 같은 개혁안을 통해 노동자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했다. 특히 자본주의의 ‘구제주인’ 케인즈도 자본주의에서 소외된 인간을 찾았다는 점에서, 마르크스가 자본주의를 구한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상황도 변하듯이 그의 이론은 여러 가지 점에서 수정이 필요한 듯하다. 따라서 우리의 역할은 마르크스의 이론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이론을 깊이 이해하고 필요한 부분을 수정하여 더 나은 자본주의로 나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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