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등이란 무엇일까? 인류는 불평등한 사회를 평등한 사회로 바꾸며 발전해 왔다. 고대에는 여성과 노예에 대한 차별이 당연했지만, 우리는 노예 제도를 없애고 여성의 권리를 확장해 왔다. 지금은 소수 인종에 대한 차별이 남아 있지만, 이것 또한 극복하려 노력 중이다.
『동물 해방』은 이 평등이라는 개념이 인간에게만 국한되는 것은 비도덕적이라고 주장한다. “인간만이 권리를 가져야 할 어떤 본질적 이유는 없다.” 흔히 인간은 이성적 존재이기 때문에 특별하다고 말하지만, 저자는 뇌병변을 앓는 고아의 사례를 들어 그 논리를 반박한다.
만약 뇌 기능이 없는 고아를 실험에 사용하는 데에 도덕적 저항감을 느낀다면, 고통을 느끼는 동물에게 실험을 하는 것도 옳지 않다는 것이다. 인간 고아의 권리가 동물의 권리보다 우선한다면, 이는 인간 중심적이고 종 차별주의적이라는 비판이다. 이는 우리가 과거 여성이나 흑인에게 했던 차별과 다를 바 없다는 주장이다.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논리는 명확하다. 우리는 어릴 적부터 인간이 동물보다 우월하다는 동화를 보고 자란다. 또 공장식 축사의 실상보다는 푸른 초원을 뛰노는 동물 이미지를 더 자주 본다. 그만큼 현실의 고통에 대해 무지하다.
동물 실험에 대해서도 흔히 이렇게 생각한다.
“동물 실험을 반대하면 수백만 명이 죽을 수 있어.”
하지만 현실은 조금 다르다. 인간에게 효과 없는 약품이 동물에게는 효과가 있을 수 있고, 그 반대도 있다. 게다가 현재의 동물 실험은 의학보다 미용, 세정제, 심지어는 학문적 호기심 때문에 더 자주 행해진다. 인간에게 아무 이득도 주지 않는 실험으로 동물이 죽어가는 것이다.
우리는 종종 관성과 자기기만 때문에 도덕적 행동을 피한다. 예를 들어, 컨닝이 나쁘다는 걸 알면서도 “이번만 괜찮아”라고 합리화하거나, 회사에서 부당한 명령에 따르는 것도 마찬가지다.
한나 아렌트가 말한 것처럼, “사유하지 않는 자는 유죄다.” 나는 『동물 해방』의 결론에 동의한다. 모두가 채식주의자가 될 수는 없다. 육식은 인류 문화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지하거나 자기기만 속에서 먹는 것과, 고통에 대해 인식하고 윤리적 소비를 하려는 태도는 다르다.
또한 채식주의자를 비웃거나 공격하는 것도 잘못이다. 우리는 도덕적 삶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 시작은 주변에 관심을 갖고,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옳은 선택을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사회와 습관은 우리를 쉽게 비도덕적 삶으로 이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