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적하고 여유로운 도시라면서요
시작은 좋았다. 다리를 건너 TORCH COFFEE에서 플랫화이트를 마시는 그 순간까지는. 오늘 별 일정 없이 세비야 좀 돌아다니다가 자전거도 타보자는 계획이었다. 한적하고 여유롭고, 평화로운 도시라고 듣고 온지라 이 도시에서는 근교 좀 다니고 천천히 걸어 다녀야지 느긋한 마음이었다. 바르셀로나는 계획으로 가득 차 있었는데 세비야에 대해서는 무지한 상태였다.
꼭 가봐야 한다는 광장으로 갔는데 나의 예상이 조금씩 빗나가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꽤 많은 관광객들이 스페인 광장을 채우고 있었다. 밀도가 높은 광장에 당황해서 여행의 중심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세비야를 마치 숙제하듯 의무감으로 여행하기 시작했다. 중심가의 조금만 유명하다는 식당은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사람이 넘쳐났다. 수차례 포화상태인 식당들을 지나쳐 조용한 골목의 조금 떨어진 곳에서 겨우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알고 보니 내가 세비야 여행을 시작한 날부터 4일 동안 스페인의 '황금연휴'라고? 하하하! 우리나라 황금연휴에 여행을 간 경험은 있어도 여행지에서 황금연휴를 만난 것은 처음이다. 이 황금연휴가 '성모 마리아의 대축일'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광장에서 사람만 모였다면 악기를 연주하고 다 함께 노래를 불렀다.
엄청난 밀도의 사람들에 지쳐 숙소에 잠시 피신해 억지로 시에스타 시간을 보냈다. 하루하루가 아쉬운 여행자의 마음으로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세비야를 다시 보기 위해 숙소를 나섰다. 해가 진 세비야는 더욱더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유대인 거리와 같은 좁은 골목 중 어느 길은 지나가기도 힘들 정도로 사람들이 꽉 차 있었다. 아마 이런 행렬은 12시가 넘어서까지 지속되었던 것 같다.
이 모습은 흡사 홍대입구역 9번 출구를 연상케 했다.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 홍대까지 마음먹으면 걸어서도 갈 수 있는 거리이지만 1년에 손에 꼽을 정도로 홍대 쪽을 지나간다. 홍대의 기운은 어릴 때와 달리 30대가 감당하기에는 어려운 곳이기에 피하고 있는데, 비행기를 타고 13시간을 날아 이곳에 와있다. 하하..
근데! 한 가지 신기한 점은, 연령대가 꽤 다양하고 가족적인 분위기라는 것. 우리나라 도심이라면 젊은 층이 대부분인데 이곳은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나이 상관없이 신나게 어울려 노는 것처럼 보였다. 어르신들도 아기들도 한 공간에 있다는 것이 조금 의아했다.
세비야의 황금연휴와 겹치며 내가 예상한 모습은 아니었으나, 이것이 세비야의 매력인가 싶기도 했다. 세비야에서 가장 많이 들은 소리가 '달그락달그락' 접시 소리였는데, 맛있는 음식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이 이들의 삶에서 가장 소중한 가치로 여기는 게 아닐까 싶었다. 세비야에서 나의 여행은 좌절이었지만, 어쩔 수 없이 세비야를 제대로 여행하기 위해 나중에 꼭 다시 와야겠다고 다짐하며 터덜터덜 숙소로 돌아왔다.
세비야, 한적하고 여유로운 도시라면서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