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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직한캐치업 Apr 05. 2017

소리로 추억을 떠올려 본 적이 있는지

소리로 떠올릴 수 있는 가장 철없는 추억은

RPG 게임에 빠져있던 때다.


소리바다에서 다운로드한 음악을

내가 만든 스킨으로 꾸민 윈엠프에 담아 틀어놓고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게임을 했다.


2000년대 초에 들었던 음악이 나오면

그 때 했던 게임 화면이 떠오른다.



소리를 기록하기 시작한 것은

위와 같은 시기, 2000년대 초.

내가 좋아하는 가수가 생기면서다.

라디오에 공테이프를 넣어두고

감탄사 하나 놓치지 않으려 라디오 앞에 앉아 정각을 기다리다

라디오 시작과 동시에 빨간색 녹음과 재생 버튼을 동시에 딸깍.

라디오가 끝나면 네모난 정지 버튼을 딸깍.

테이프를 꺼내 날짜와 라디오 프로그램명을 적고 고이 보관했다.

사실 소리를 기록했다기 보단

그들의 모습을 내가 소유할 수 있는 형태로 담아 둔 것이다.


그런 것들이 재미였던 시간이 지나니 흥미가 시들해졌고

소리를 기록하는 행위도 절로 하지 않다가

다시 시작한 건, 비의도적이었다.

우연히 눌린 통화 녹음 버튼 때문이었다.


나도 모르는 새

녹음 버튼을 얼굴로 눌러버려

녹음됐다는 사실도 모르고 지내다

핸드폰에 저장된 것들을 정리하다가 발견한다.

궁금함에 한 번 들어보고는 이내 삭제한다.


이후로도 녹음은

구두 계약할 때나 쓰이는 거다,

사무적으로 생각하다


감성적인 개념으로 돌변하여

의도적으로 소리를 기록하기 시작한 것은

마지막 20대라는 소녀 감성에 푹 젖어있던

스페인 여행 때였다.


온 감각을 곤두세우고 다닐 때라

향긋한 새벽 냄새든

매캐한 담배 냄새 풍기는 거리 냄새든

전부 좋다며 놓치지 않으려 했고,

흔한 바람 소리에도

하나도 알아듣지 못하는 외국어 대화 소리에도

마음이 말랑거릴 때였다.


그것들을 흔적으로 남기기엔

사진도 부족하다 여겨

동영상으로 장면, 장면을 남기다가


노래만 들어도 게임 화면이 펼쳐지던 것이 번뜩 떠올라

한국에선 다시 듣기 힘들 소리들을 녹음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

축제의 음악 소리

거리 악사의 연주 소리


그 소리 앞 뒤로 들어가는 내가 바스락거리는 소리.

녹음 버튼을 누르고 가방에 넣느라,

정지 버튼을 누르려고 가방에서 꺼내느라.


그 소리는 마치

약간 과장하면

LP가 돌아가기 전 지직거리는 소리같아서


여행에서 돌아와

그 때가 생각날 때

감성기폭제 역할을 충실하게 해낸다.



내가 기록한 소리는

추억 회상을 넘어

나를 다른 세계로 이끄는 환상을 가져다준다.


출근길에 이어폰을 꽂고

녹음 목록 중

'라스 파야스'를 재생하면

발렌시아의 축제 모습이 펼쳐지고,

'레티로 공원'을 재생하면

넓은 호수에 배를 타고 지나가던 노부부가 떠오른다.

출근길에 떠오르는 걱정들은 잠깐 잊는 순간이다.



소리로 추억을 떠올리는 것은

우연히 길에서 지인을 만난 것처럼

반가운 일이다.


그리고 그 기억할만한 순간을 소리로 기록하는 일은

과거를 떠올리기에 꽤 매력적인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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