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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수현 Jul 27. 2022

2-4. 제삼자가 끼면 더 이상 둘만의 문제가 아니다



1. 새로운 등장인물 그리고 갈등


        우리 이야기는 슬슬 끝을 향해 갑니다. A는 약속대로 10억 원을 B에게 주었고, B 역시 약속대로 X아파트를 A에게 주었습니다. 소유권 이전등기도 모두 문제없이 마쳤습니다. '그렇게 모두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라는 문장과 함께 이야기를 마무리 짓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습니다. 하지만 아직 완전히 끝난 게 아닙니다. 새로운 인물 C가 이야기에 등장합니다. C는 2023. 1. 1. A로부터 X 아파트를 12억 원에 샀습니다.



[그림 2-9]



        이번에도 별문제 없이, C는 약속대로 12억 원을 A에게 주었고, A도 약속대로 X 아파트를 C에게 건네주었습니다. 소유권 이전등기도 마쳤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X 아파트의 새 주인이 되었다 생각하며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는 C에게 갑작스레 B가 찾아온 겁니다. B는 C를 보자마자 다짜고짜 X 아파트를 내놓으라고 윽박지릅니다.

  

  "내 아파트 당장 돌려주시오!"

  "예? 무슨 말씀이신지요. 저는 X 아파트의 정당한 소유자입니다만. 전(前) 소유자 A로부터 12억 원을 주고 합법적으로 매수했습니다."

  "X 아파트는 A가 협박을 해서 어쩔 수 없이 판 것입니다. 혼자 끙끙 앓다가 최근에 용기를 내서 협박죄로 고소도 하고, A와 맺은 계약도 취소했소."

  "그래서요? 그게 나랑 무슨 상관입니까?

  "무슨 상관이냐니. 나와 A 사이의 계약이 없던 것으로 됐으니 당신도 정당한 소유자가 될 수 없는 게 이치 아니겠소! A는 처음부터 단 한 번도 X 아파트의 소유자였던 적이 없는데!"


        그러면서 B는 두꺼운 민법전을 C 얼굴에 들이밉니다. B의 손가락은 민법 제110조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사기나 강박에 의한 의사표시는 취소할 수 있다.' 밑줄이 여기저기 그어진 걸 보니 단단히 공부를 하고 온 모양입니다. B의 주장은 타당한 걸까요? C는 X 아파트를 B에게 돌려주어야 하는 걸까요, 아니면 돌려주지 않아도 괜찮은 것일까요?







2. C를 보호해야 할까?


1) B 주장에 대한 짧은 옹호


        B의 주장은 얼마나 타당한 것일까요? B의 주장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선 처분행위, 유인론 같은 개념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지금 다루기에는 다소 큰 주제들이므로 다른 장에서 자세히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제5장 참고]. 지금은 상식만으로 이 문제에 접근해 봅시다. 조금만 생각해보아도 B의 주장이 마냥 헛소리가 아님을 금방 이해할 수 있습니다.



  (1) 정당한 권리자만이 정당한 권리자를 낳는다. 앞선 자가 물건의 정당한 권리자가 아니라면 그로부터 물건을 건네받은 사람도 권리자가 될 수 없다.

  → 무(無)권리가 유(有)권리를 창조할 수 없다는, 간단하면서도 명료한 원칙입니다. 이에 따르면 A가 X 아파트의 정당한 권리자가 아니라면 그로부터 X 아파트를 건네받은 C도 정당한 권리자가 될 수 없습니다.


  (2) 의사표시의 취소나 계약의 해제는 소급효(遡及效)를 갖는다. 즉 취소나 해제가 되면 그 의사표시/계약은 처음부터 무효였던 것으로 본다.

  → 소급(遡及)이란, '거슬러 올라가다'란 뜻의 한자어입니다. 어떤 법률효과가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는 성질이 있을 때 소급효가 있다고 표현합니다. 민법의 취소와 해제에는 소급효가 있습니다. 따라서 의사표시를 취소하면 그 의사표시는 처음부터 무효인 것으로 보며, 계약을 해제하면 그 계약은 처음부터 무효인 것으로 봅니다.



        위 두 명제를 종합해보면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합니다. ① B가 민법 제110조에 근거해 A에 대한 의사표시를 취소합니다. ② 그러면 그 의사표시 및 이에 근거한 계약은 "처음부터" 무효였던 것이 됩니다. ③ 계약이 처음부터 무효이므로 A는 X 아파트의 정당한 권리자였던 적이 없습니다. ④ 따라서 A로부터 X 아파트를 받은 C 역시 정당한 권리자가 될 수 없습니다. ⑤ 따라서 B의 주장이 타당하고, C는 원 소유자인 B에게 X 아파트를 돌려주어야 합니다.





2) C를 보호해야 할까?


        B의 주장은 일응 타당합니다. 이제 C는 영락없이 X 아파트를 뺏길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이대로 B의 손을 들어주기에는 C가 너무 억울해할 것 같습니다.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봅시다. A에게 협박을 당해 강제로 X 아파트를 팔아야 했던 B는 억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B가 억울하다면 C는 더 억울합니다. C는 무슨 죄입니까? C 입장에서 X 아파트를 뺏긴다면 정말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는 기분일 겁니다.


        사회 전체 관점에서도 C를 보호해줄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C 같은 상황을 보호해주지 않는다면 아파트 거래에 응하려는 사람이 많이 줄어들 것입니다. 겁이 나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원 소유자에 의해서 아파트를 도로 뺏길지도 모르는데 누가 쉽게 거래에 응할까요. 따라서 우리는 C를 보호해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해야 거래의 안전을 해치지 않습니다. 하지만 또 반대로, 항상 C만 보호해줄 수는 없습니다. 상황에 따라서는 B를 보호해주어야 할 필요성이 더 크거나 C를 보호해주어야 할 필요성이 적은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3) 누구 편을 들어주어야 할까?

        

        C와 같은 사람을 법률용어로 제삼자라고 합니다. 쉽게 말해 제삼자란, 사건의 당사자는 아닌, 그러나 사건에 이해관계를 갖는 사람을 말합니다. B가 A에게 '좋습니다. X 아파트를 10억 원에 팔겠습니다.'라고 말할 때, 의사표시의 당사자는 B와 A입니다. C는 아닙니다. 그러나 A, B 사이의 의사표시가 취소가 되면 C도 영향을 받으므로 C는 제삼자입니다. 법률행위와 계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법률행위나 계약의 당사자는 A와 B 뿐입니다. C는 당사자가 아닙니다. 그러나 A와 B 사이의 법률행위 또는 계약이 무효가 되면 C에게도 영향을 줍니다. 따라서 C는 제삼자입니다.

    

        민법은 제삼자 보호를 큰 원칙으로 삼습니다. 그러나 상황에 따라 예외를 두기도 합니다. 앞서 말했듯이 제삼자를 보호해주어야 할 이유가 적거나 당사자를 보호해주어야 할 이유가 더 큰 경우에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만약 C가 A와 B의 사정을 모두 알고 있었다면 C를 보호해줄 필요가 적어질 겁니다. C가 주장하고 싶은 건 결국 자신은 A가 X 아파트의 정당한 소유자인 줄 알았다는 겁니다. 하지만 C가 뒷 사정을 모두 알았다면 A를 정당한 소유자로 쉬이 생각하지 않았을 겁니다. X 아파트는 A가 협박으로 취득한 물건이기 때문이죠. 혹여 C 스스로 문제없다고 생각했더라도 사회가 용인하기 어렵습니다.

  

        어떠한 사실을 아는 상태를 법학에서는 악의라고 합니다. 반대로 어떠한 사실을 모르는 상태는 선의라고 합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용어와 달라 조금 어색한 느낌입니다. 그러나 전문용어이므로 너무 의미부여하지 않고 그냥 익숙해지면 되겠습니다. 법학에서 선의/악의는 착한 마음, 나쁜 마음과 무관합니다. 그냥 어떤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를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우리 이야기에서 C가 악의라면, 그를 보호해줄 필요는 적어집니다. 이때에는 원 소유자 B에게 X 아파트를 돌려주어야 할 겁니다. 그러나 C가 선의라면 X 아파트를 뺏기지 않을 수 있도록 보호해주는 것이 타당할 것 같습니다. 아래서 곧 보겠지만 실제 민법 규정은 두 경우를 나누어 판단하고 있습니다.







3. 임무: 제삼자를 보호하라!


        선의의 C는 보호하고, 악의인 C는 보호하지 않는다는 결론은 제삼자 보호의 한 예에 불과합니다. 실제 제삼자 보호 논의는 훨씬 다양하고 상황에 따라 다릅니다. 제삼자 C를 왜 보호해주어야 하는지, 언제 보호해주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간단한 논리를 세웠으니 이제 실제 법에서는 뭐라고 하는지 확인해봅시다. 법학은 순수 논리 학문이 아닌, 해석과 주석의 학문이므로 어느 정도 논리를 세운 뒤에는 반드시 조문을 직접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1)

제110조(사기, 강박에 의한 의사표시) ①사기나 강박에 의한 의사표시는 취소할 수 있다. ... ③... 의사표시의 취소는 선의의 제삼자에게 대항하지 못한다.


        사기나 강박에 의한 의사표시는 취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의사표시의 취소는 "선의의" 제삼자에게 대항하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제삼자가 뒷 사정을 모르는 상황에만 그를 보호하겠다는 겁니다. A가 B를 협박한 사실을 C가 알고 있다면(=악의라면), 그는 취소의 영향을 받습니다. 악의의 C는 B에게 X 아파트를 돌려주어야 합니다.  


        여기서 잠시 "대항하지 못한다"라는 표현을 음미해봅시다. 이 문장은 민법전 전체를 통틀어 가장 많이 등장하는 표현 중 하나로, 민법의 사고방식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B가 제110조에 근거해 의사표시를 취소하면 의사표시는 취소됩니다. 제삼자 C가 있기 때문에 취소를 못한다? 그렇지 않습니다. 민법 제110조는 법률요건으로 '강박에 의한 의사표시'만을 정하고 있습니다. 강박에 의한 의사표시가 있으면 의사표시는 취소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선의의 제삼자에게 의사표시 취소 사실을 대항하지 못합니다. 선의의 제삼자에게 그러한 사실을 주장하지 말란 겁니다. 취소는 취소고, 그 사실을 제삼자에게 주장할 수 있는지 여부는 다른 문제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걸까요? 간단합니다. A와의 계약(정확히는 의사표시)은 취소되었으니 무효이고, 단 C로부터 X 아파트를 가져오지는 못합니다. B가 화가 난다면 A에게 성질을 부리면 됩니다. C에게는 아무런 화풀이를 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민법은 단계를 나누어서, 각 당사자끼리 판단하는 사고방식을 좋아합니다. B와 A의 문제는 B와 A의 문제고, B와 C의 문제는 B와 C의 문제입니다. 앞으로도 자주 등장할 방법론이니 미리 익숙해지도록 합시다.




(2)

제548조(해제의 효과, 원상회복의무) ①당사자 일방이 계약을 해제한 때에는 각 당사자는 그 상대방에 대하여 원상회복의 의무가 있다. 그러나 제삼자의 권리를 해하지 못한다. ...


        계약을 해제하면 각 당사자는 그 상대방에 대하여 원상회복의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나 제삼자의 권리를 해하지는 못합니다. 흥미롭게도 민법 제548조에는 선의나 악의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실제 계약 해제에 대해서는 선의, 악의를 불문하고 제삼자를 보호합니다! 거래의 안전을 지키겠다는 입법자들의 강한 결단력을 읽어낼 수 있는 부분입니다. 해제의 제삼자는 사실 할 이야기도 많고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어려운 법리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조문 자체에 주목해봅시다. 의사표시 취소와 대조적으로 계약의 해제에서는 제삼자의 선악을 불문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3)

제103조(반사회질서의 법률행위) 선량한 풍속 기타 사회질서에 위반한 사항을 내용으로 하는 법률행위는 무효로 한다.


        선량한 풍속 기타 사회질서에 위반한 사항을 내용으로 하는 법률행위는 무효로 한다. 땅땅땅. 그리고 끝입니다. 제삼자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 문언 해석상 제103조에 근거해 법률행위가 무효가 되면 제삼자는 선악을 불문하고 보호받지 못합니다.


        앞서 법률행위를 배우며 A와 B의 거래가 이중매매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사안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제2매수인 A가 B의 배임 행위에 적극 가담한 경우에는 법률행위가 무효라는 결론이었습니다. 여기에 제삼자가 끼면 어떻게 될까요? A가 반사회적 이중매매로 취득한 X 아파트를 C에게 팔았다고 해봅시다. C는 이중매매 사실에 대해선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C를 보호할 수 있을까요? 없습니다. 조문이 없기 때문입니다. 민법 제103조에는 선악 불문 제삼자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 제103조에선 제삼자도 보호하지 않겠다는 입법자의 강력한 결단이죠. 따라서 C는 설령 이중매매 사실에 대해 전혀 무지한 상태였다고 하더라도 보호받을 수 없습니다.


        이처럼 제삼자 보호 문제는 규정마다 다르게 접근합니다. 제삼자 구조 자체는 동일한데 결론이 다 다른 것입니다. 어느 경우에는 선의인 경우만 보호하고, 어느 경우에는 선악을 불문하고 보호하며, 또 다른 경우엔 선악을 불문하고 보호하지 않습니다. 민법에는 이외에도 제삼자 보호 규정이 많습니다. 다른 예들은 앞으로 더 공부해봅시다. 다만 주의할 점은, 앞서 보았듯이 제삼자 보호 문제는 논리로만 접근할 수는 없는 문제이므로 반드시 조문을 찾아 읽어 보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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