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회사 적응기
회사를 다니다 보면 유난히 마음이 잘 맞는 사람이 있다. 지칠 수 있는 회사 생활이 그 사람 때문에 유쾌하고 그 사람으로 인해 위로를 받는다. 혹시 상사에게 혼나거나 골치 아픈 일이 생기면 마음에 맞는 그 사람은 직접 도움을 주기도 하고 이야기를 들어주며 응원을 해준다. 참 고마운 존재가 아닐 수 없다.
반면 묘한 긴장감을 느끼게 하는 동료가 있다. 이건 딱히 사이가 나쁘다 라고 단정 지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평소에는 서로 미소 짓고 농담도 나누며 잘 어울린다. 남들이 보면 사이가 꽤나 좋은 것으로 비칠 수 있을 만큼 화기애애한 분위기도 연출된다. 그런데 그 사람과 조금이라도 일적인 것으로 엮이기만 하면 마음이 편칠 않다.
‘키타큐슈 이야기’ 7화와 8화에서 등장했던 핫토리상이 바로 내게 그런 존재이다.
우리 회사는 일본 전역에서 철스크랩과 비철스크랩 - 흔히 고철로 표현되곤 한다 – 을 모아서 가공을 한 후 해외의 제철회사에 원료로 수출하고 있다. 핫토리상은 이 스크랩 구매 총 책임자이다. 그러면서 재무와 인사팀장을 겸임하고 있다. 회사의 규모가 작기 때문에 가능할 것이다. 나는 이렇게 모인 스크랩의 수출을 총괄하고 있다.
그녀와 나는 같은 사무실 바로 옆자리에 앉아 일하고 있기 때문에 매일매일 회사의 그 누구보다 함께 하는 시간이 많다. 핫토리상은 이 회사 입사가 나보다 10년 이상 빠르고 나이도 십 수년 손위다. 게다가 이 분은 내게 있어 최고의 일어 선생님이나 다름없다. 일본에 온 지 2년이 넘어가는 시점에서 생각해보면 사무실 바로 옆에서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쉴 새 없이 떠들며 일하는 그녀 덕분에 생생한 일본어 공부를 매일 하고 있다.
이런저런 이유로 나는 핫토리상에게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고 평소에 최선을 다해 깍듯이 예우를 해드리려고 노력한다. 워낙 헌신적으로 일하는 분이라 회사를 위해서도 없어서든 안 될 인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감사한 건 감사한 거고 아직까지 핫토리상과 마음으로 친해지지 못한 것 같다. 일본 사람들이 대개 우리나라 사람들에 비해 쉽게 마음을 트지는 않는다. 부드럽고 친절하기는 하지만 우리처럼 좀 친해지면 후욱 들어오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 각자 자기가 정한 선까지만 와서 건너편의 상대를 몇 발자국 떨어져서 대하는 느낌이다.
게다가 이 분이 보통 일본 사람들에 비해 말이 엄청 많고 설교 조의 말투가 자주 나온다는 것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내가 나이로 보다 입사 연도로 보나 훨씬 손아래이고 외국인으로서 일본어 구사에도 문제가 있는지라 기본적으로 뭔가를 알려주거나 가르칠 필요가 많다고 느끼는 것 같다.
정말 그녀에게 많이 배우고 감사해하고 있지만 가끔씩 거슬린다. 전직 수학 선생님이었던 그녀의 태도는 누군가에게서 배우려는 태도보다는 누군가를 계도하고 가르치려는 모습이 몸에 배어 있다. 상대의 말을 듣는 것 같으면서도 필요 이상으로 자기 의견을 가르치려고 드는 것 같아 거부감이 일 때가 많다. 나는 이곳에서 여전히 더 배워야 함을 인정한다 손 치더라도 평소 그녀와의 대화는 일적으로 엮일 때 참 긴장되는 것이다.
그러다 며칠 전 일이다.
거래처의 요청으로 시장 가격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다. 당연히 구매 총 책임자인 핫토리상한테 물어보면 제일 손쉽게 자료를 작성할 수 있지만 매일매일 격무에 시달리는 그녀를 귀찮게 하고 싶지 않아 모자란 일어로 각 지역 영업 담당자들에게 이번 주 시황을 물어봤다.
문자로 받은 가격의 수준이 생각했던 것보다 낮게 나와서 의문이 생겼다. 그래서 핫토리상에게 이게 맞는 정보인지를 물어보았다. 그녀는 정보 내용을 보더니 간단히 맞는 것 같다고 대답했다.
나는 의아했다. 핫토리상이 최근까지 구두로 나에게 얘기해 주었던 시장 가격은 이 보다 훨씬 높은 가격이었기 때문이다. 자기가 나한테 이야기해준 가격보다 각 영업 담당자들한테 보고받은 가격이 더 낮았는데 왜 설명이 없는 걸까?
“ 핫토리상, 어제까지 저한테 우리 구매 가격이 kg당 150엔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
“ 하이, 소 데쓰 (네, 맞아요) ”
“ 그런데 왜 영업 담당자들은 140~145엔이라고 보고를 하나요?”
“ 아, 소래와 합뾰카카구다께데쓰. 이쯔모 우라카카쿠가 아리마스. (아, 그건 발표 가격일 뿐입니다. 항상 이면 가격이 존재합니다.) ”
“ 정말 우리 구매 가격이 150엔 맞는 겁니까? 그 이상이나 그 이하로 사는 경우는 없는 겁니까? "
“ 하이, 소 데쓰. 다이분 150 엔데 캇테이마쓰요. 헤킨데키나. (네, 맞아요. 대부분 150엔에 사고 있어요. 평균적으로요.)”
“ 핫토리상, 저한테는 100% 다 말씀해주셔도 됩니다. 저도 이 회사 직원이고 회사의 이익을 위해 일하고 있어요. 저한테 싸게 구매하는 경우를 말씀해 주셔도 판매할 때 우리 이익이 깎이지 않도록 알아서 잘 네고할 거란 말입니다! ”
나는 이야기를 할수록 더 격앙되었다. 왜냐하면 평소 핫토리상이 나한테 해주는 이야기가 항상 정확하고 100% 맞는 정보가 아니라는 것을 여러 경로를 통해 확인했기 때문이다. 물론 내 일본어가 모자라 그녀가 하는 설명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여 오해가 생겼을 가능성도 있다. 그동안 매번 열을 내면서 시시비비를 가리지는 않았다.
아마 내 목소리가 점점 커졌나 보다. 그리고 내 표정이 점점 일그러졌나 보다. 웃음기가 사라진 평소의 친절하고 상냥했던 나는 핫토리상과 이야기하면서 완전히 변해 있었다.
“ 핫토리상! 제가 평소에 어떻게 느끼는 줄 아세요? 올해 시황이 계속 안 좋아서 정말 어렵사리 판매 가격 협상을 하고 있어요. 매번 가격 협상을 할 때마다 핫토리상은 희망 가격을 말씀하시죠. 그것도 꽤나 높게. 저도 가능하면 손해를 안 보고 이익을 많이 남기는 가격을 받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 노력합니다. 하지만 우리 정보가 잘못되었거나 우리가 무리한 요구를 하게 되면 거꾸로 우리 입장이 난처해져요. 힘들어진단 말입니다! ”
“ 핫토리상이 말은 쉽게 하지만 가격협상이 말처럼 쉬운 건가요? 그럴 때 전 핫토리상이 마치 -내 일 아니니까 당신 알아서 잘 받아 내세요- 하는 것 같은 느낌이에요!! ”
난 미소끼 하나 없는 얼굴로 평소에 쌓였던 것 같은 이야기를 퍼부어댔다. 가격협상은 자기 일이 아니라고 그녀가 나몰라라 하는 듯한 인상을 몇 번 받았던 나는 그 얄미웠던 기억 때문인지 그녀를 몰아세웠다.
갑자기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그녀가 옆에 있던 화장 티슈 몇 장을 집어 들더니 흐느끼기 시작했다.
“ 저, 목소리 좀 낮춰서 얘기해주시면 안 돼요? 이 부장이 그렇게 큰소리로 말하고 뭐라 그러니까 가슴이 쿵쾅거려서 말을 못하겠어요. 흑흑... 제가 뭘 잘못 했는지 잘 모르겠어요. 왜 저한테 이렇게 하시는지 흑흑…”
아…. 이건 아닌데….
당황스러웠다. 내가 뭔데 그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는 그녀를 울리는가. 아, 정말 이렇게 하려고 했던 건 아닌데… 나는 고개가 숙여졌다. 정말 예상치 못한 상황에 직면하여 말을 잃고 말았다.
평소 정말 강하게 보였던 그녀, 부하 직원들을 깨고 혼내고 설교하던 그녀였는데 내가 목소리 좀 높여 불만을 말했다고 이렇게 눈물까지 쏟다니…
“제 목소리가 커졌는 줄 몰랐습니다. 죄송합니다. 핫토리상. 정말 미안합니다.”
핫토리상은 티슈로 눈물을 훔친 다음에 자기 노트북을 열어 현재 내부 가격 현황을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자기가 평소에 제대로 설명해주지 못한 점 미안하게 생각한다며 앞으로 필요하거나 의문이 생기는 경우 언제든지 말해달라고 했다.
나는 아무 말없이 그녀 옆으로 다가가 그녀의 노트북을 주시하며 조용히 설명을 듣고 있었다. 그리고 머리 속으로는 나의 경솔함에 대해 곱씹고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는 핫토리상을 울리는 일은 하지 말자고 다짐하고 있었다.
잠시 후 설명을 마친 그녀는 사장님의 호출을 받고 사무실을 떠났다.
혼자 사무실에 남아 방금 있었던 해프닝을 돌이켜 보았다. 내 불만을 털어놓았고 핫토리상에게 강하게 어필했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정말 죄송했다. 그리고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아직도 나는 이 정도 밖에 되지 않는구나. 갈등을 지혜롭게 풀어내지 못하는구나. 왜 사람을 울려! 왜 가슴 아프게 해!
하루 종일 이 사건이 뇌리에서 맴맴 떠나지 않고 생각의 꼬리를 물었다.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핫토리상, 오늘 정말 실례가 많았습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너그러이 이해해 주세요. 그리고 저 너무 미워하지 말아 주세요.”
핫토리상과 나는 앞으로 어떤 사이가 될는지…
부디 이번 일로 그분의 마음이 닫히지는 않았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