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림 약국에서 회군하며
몰랐던 이와 친구가 되는 기쁨
가을 최고의 날씨를 업고 원주로 향했다. 친구 하나가, 새로 만든 이층집을 통째로 빌려 1박 2일의 숙소를 제공하기로 했다. 수원에서 출발하는, 모임 주최자의 다른 친구의 배려로 차를 얻어 타고 용인에서 기분 좋게 스타트를 끊었다.
한 시간 반이면 대략 목적지에 닿을 것으로 생각했으나 백마 터널 안에서 일어난 앞선 차들의 충돌 사고로 시간은 속절없이 지체되었다. 11시 25분에 용인서 출발한 우리는 1시 반이 넘어서야 목적지인 신림에 도착했다. 그러나 약속 시각 12시에 이미 모인 다른 일행들은 점심을 먹으러 20여 분 떨어진 원주 시내로 이동해 버리고 없었다.
우리 일행에는 나를 포함해 남자 성인 셋과 초등학생 둘이 있었다. 두 시가 다 되어가기에 앞선 일행들을 찾아 점심을 같이 먹기보다는 따로따로 식사를 해결하기로 했다. 눈앞에 중국집과 칼국수집이 있었고 아이들의 요청으로 칼국수를 먹으러 들어갔다. 그러나 주인장이 오늘 장사를 안 하신단다.
선택의 여지가 없으므로 옆자리 중국 요릿집으로 갔다. 매운 짜장과 짬뽕을 시켜 나눠먹기로 했다. 아이들도 어른들도 짬뽕보다 매운 짜장면의 맛에 더 만족했다. 우리나라 사람 치고 매운맛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 나도 평균치 한국인에 비해 매운맛에 강한 사람은 아니지만 칼칼한 맛이 주는 즐거움을 어찌 마다하겠는가.
귀국해서 아직 차가 없는 나를 고맙게도 원주까지 태워 준 이는 모임의 모든 성인 멤버들과 마찬가지로 소띠 동갑내기였다. 하루 전날 모임 주최자 친구의 소개로 메신저에서 인사를 나누고 아침에 출발하면서 처음 대면했다. 서글서글한 눈매에 여유가 있는 말투로 편안히 말을 건네는 그는 뒷좌석에 초등학생 아들 둘을 태우고 왔다. 두 아들 가운데 장남의 얼굴이 아빠와 많이 닮아 있었다.
강원도로 향하는 차 안에서 가을 파아란 하늘과 노오랗게 물든 논을 배경 삼아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도란도란 나누었다. 이 친구도 본래는 나와 같은 샐러리맨이었으나 얼마 전에 식당을 차렸다고 한다. 자동차나 기계 커넥터 판매 영업을 하던 사람이 본업을 그만두고 식당을 차렸는데 놀라운 것은 혼자 요리도 하고 홀써빙도 하고 설거지며 청소까지 1인 다역을 하고 있다는 거였다.
음식남녀
많이들 이미 봤음직한 영화라고 생각되는 이 이름이 그가 차린 식당이다. 아주 오래전에 본 영화라 내용이 잘 기억나지 않지만 음식을 소재로 가족사를 흥미롭게 풀어 가는 작품으로 기억한다. 그는 이 영화에 나오는 한 인물의 대사를 인용하며 자신이 왜 영화 이름으로 식당 작명을 하게 되었는지 알려 주었다. 운전을 하며 건넨 그의 말이 잘 기억나지 않아 글로 옮길 수가 없다. 아무튼 매우 개성 있고 자기 색깔이 분명한 친구로 느껴졌다.
식당에서 만들어 내는 음식은 대중적인 고기 요리 같은 것도 있지만 마스터만의 독특한 창작 메뉴들이 기다리고 있단다. 테이블은 겨우 다섯 개이고 인상적인 건 손님을 하루에 세 팀만 받는 걸로 한다고. 덕담으로 식당이 잘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는데 손님 많아지는 건 싫단다. 소문 나서 사람들이 많아지면 힘들다고 그냥 유지할 정도면 된다고 했다. 정작 소문이 나고 손님이 많아지면 싫어할까 싶었지만, 그렇게 말하는 친구의 말에서는 진정성이 느껴졌다.
내가 제일 약한 분야가 요리 만들기다. 같은 남자로서 요리 만들기를 즐겨하고 또 재능이 있는 남자를 보면 좋아 보인다. 내가 그렇게 되고 싶다는 욕심은 들지 않지만 요리 잘 하는 남자만의 멋이 있다. 지금까지도 요리를 직접 하는 것에 대한 의지는 별로 없지만, 언젠가는 내 손으로 만든 요리를 아내와 딸에게 선물해 주고 싶은 마음이 한 구석에 자리하고 있다.
판단 미스
점심을 먹고 나니 두 시 반 가까이 되었다. 오늘 모임은 본래 1박 2일 코스지만 나는 저녁 6시에 서울에서 다른 약속이 있어 돌아가야만 했다. 아직 새로 만든 집을 구경도 못하고 먼저 도착한 친구들과 그 가족들을 만나지도 못한 채 많은 시간이 흘러버렸다. 매운 짜장면을 다 먹고 난 지금, 이동을 해서 다른 일행들과 만난다면 세 시가 넘어갈 것이다. 차가 있다면 모를까 기차를 타고 서울에 가서 다시 대중교통을 이용해 강남까지 가야 하는 상황이라 시간이 없었다.
모임에 초대한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사정 설명을 했더니, 원주까지 와서 짜장면만 먹고 돌아가냐고, 그냥 저녁 약속을 포기하고 여기에 남으면 안 되겠냐고 했다. 지극히 당연한 반응이었으나 저녁 약속도 취소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친구에게 미안함을 전하며 신림역으로 향했다.
음식남녀 사장 친구가 신림역까지 태워 줬는데 하하! 신림역에서 청량리역으로 가는 기차는 저녁 여섯 시나 되어야 출발하는 일정이었다. 산과 들로 뒤덮인 마을 한 구석에 조그맣게 자리 잡은 시골의 기차역이 마음에 든 우리들은 짧은 만남을 아쉬워하며 사진을 찍기로 했다. 사진 몇 장을 찍고 역사 마당에서 가을의 정취에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노라니 예약한 택시가 도착했다. 원주역으로 가기 위해서 부른 것이다.
결국 이 날 왕복 네 시간 반 이상을 들여 경기도에서 강원도를 오간 나는 원주에 도착해서 매운 짜장면을 먹고 신림역에서 사진 몇 장을 찍는 매우 실질적이면서 군더더기 하나 없는 일정을 보내고 온 것이다. 어떤 사람도 이런 에피소드를 듣는다면 시간이 아깝다 반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정작 그 시간을 그렇게 보내고 온 나는 그 하루가 결코 아깝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뭔가 뿌듯하고 산뜻한 하루를 잘 보낸 것 같았다.
좌석이 없어 입석표를 샀지만, 플랫폼에서 기다릴 때 내 앞에 멈춰 서던 열차는 식당칸이었다. 나는 유유히 식당칸의 의자에 앉아 가을의 오후 햇살이 누워가던 황금빛 들판을 바라보며 기차여행을 할 수 있었다. 햇살이 아직 따가워 간간히 커튼을 쳤다 열었다를 반복했지만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좋았다.
날이 더 쌀쌀해지기 전에 다시 강원도를 찾고 싶어 졌다. 그때는 다른 약속을 다 접고 한 이삼일 가을 풍경을 즐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