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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드레아 Apr 03. 2020

일곱 배로 너에게 갚아 주시리라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네게 주신 대로 바치고 기꺼운 마음으로 능력껏 바쳐라. 주님께서는 갚아 주시는 분이시기에 일곱 배로 너에게 갚아 주시리라. 그분에게 뇌물을 바치지 마라. 받아 주지 않으신다. 불의한 제사에 기대를 갖지 마라. 주님께서는 심판자이시고 차별 대우를 하지 않으신다. 그분께서는 가난한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부당한 대우를 받은 사람의 기도를 들어주시리라. 그분께서는 고아의 간청을 무시하지 않으시고 과부가 쏟아 놓는 하소연을 들어주신다. 과부의 눈물이 그 뺨에 흘러내리고 눈물을 흘리게 한 자를 거슬러 그가 부르짖지 않겠느냐? 뜻에 맞게 예배를 드리는 이는 받아들여지고 그의 기도는 구름에까지 올라가리라. 겸손한 이의 기도는 구름을 거쳐서 그분께 도달하기까지 위로를 마다한다. 그는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살펴 주실 때까지 그만두지 않으니 그분께서 의로운 자들의 송사를 듣고 판결해 주신다. 주님께서는 머뭇거리시거나 악인들을 참아 주지 않으신다. 무자비한 자들의 허리를 부러뜨리시고 이방인들에게 원수를 갚으실 때까지, 방자한 자들의 무리를 땅에서 뽑아 버리시고 불의한 자들의 왕홀을 부러뜨리실 때까지, 사람에게 그 행실대로 갚으시고 사람들의 소행을 그들의 속셈에 따라 갚으실 때까지, 당신 백성의 송사를 판결해 주시고 당신의 자비로 그들을 기쁘게 하실 때까지 그렇게 하신다. 그분의 자비는 시련의 시기에 가뭄에 비구름처럼 반가우리라. <집회서 35장 12~26절>


 혹시 지금 많이 힘드신가요? 저도 그저께까지 좀 많이 힘들었습니다. 지금도 문제가 다 해결된 건 아닌데 어떤 시점에서부터 제 마음에 조금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저에게는 믿음의 친구 가족들이 있습니다. 단톡방에 친구들과 친구들의 배우자까지 함께 모여 있는데 세상 살아가는 온갖 주제들로 자주 수다를 떨고 서로의 일상을 나누곤 합니다. 저만 천주교 신자이고 다른 네 가족은 모두 개신교 신자들입니다. 교리적으로 다른 부분이 있지만, 우리가 삶을 이야기하고 신앙으로 서로에게 다가가는 데에 전혀 지장이 없습니다. 근본적으로 우리가 믿는 절대자는 같은 한 분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최근 몇 년 이 나라 저 나라 근거지를 옮기면서 돈 때문에 많이 힘들었습니다. 그냥 안정적인 직장인으로 살아갈 때는 돈으로 인한 스트레스의 강도가 지금처럼 크지 않았습니다. 허덕일 때도 있고, 풍족하지 못해 불만일 때도 있었지만, 숨이 막힌다거나 이러다 정말 내 인생이 끝나버리는 게 아닐까 하는 공포나 두려움까지 가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정말 우연한 기회에 독립하게 된 이후로는 경제적인 상황의 좋고 나쁜 기복이 너무나 커서 감당하지 못할 때가 잦아졌습니다.


 이렇게 감당하지 못할 만큼 마음이 힘든 상황이 찾아올 때마다 같은 믿음을 가진 친구 가족들이 저를 붙들어 세워 주더군요. 현실이라는 시련을 맞으면 무뎌지고 약해지는 제 믿음이 다시 제자리를 찾아 서 있을 수 있게끔 흔들리는 제 머리와 가슴을 지켜 주었습니다.  

    

 힘들 때일수록 혼자 지내지 마세요.


 바빠서 잘 만나지 못한 부모님과 약속을 잡고 식사를 한 끼 하세요. 맛난 식사 한 끼 같이 하면서 아무 이야기나 편하게 나누세요. 아빠, 엄마 목소리 듣고 얼굴 보면서, 세상이 다 날 버려도 끝까지 내편이 되실 그분들로부터 힘을 얻으세요. 오랜만에 동생이나 형, 누나 혹은 여동생과 만나 차 한 잔 하며 이야기 나누세요. 사이가 나빠도 그냥 한 번 연락해서 만나 보세요.


 멀리 있어 자주 보지 못하는 마음의 친구들과는 톡이나 전화로 수다를 떨어야 합니다. 당장 옆에서 나에게 무언가 물질적으로 도와주는 게 아니더라도 친구와의 소통은 작지 않은 위로가 되고 힘이 됩니다. 우울함, 좌절감, 상실, 외로움에 점점 빠져가는 나를 건져 올릴 아주 강력한 치유의 존재들입니다. 두말하면 잔소리. 만나면 더 좋지요. 만나지 못하는 상황일 때 적어도 서로 목소리를 듣고 소식을 나누어야 합니다.


 저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가톨릭 신자입니다. 그리고 저는 세속의 사람입니다. 세속에 속한 사람이지만, 결국 가장 힘들고 괴로운 때에는 그분을 찾게 됩니다. 한때 한 마음이라 생각했던 사람과 헤어졌을 때에, 실직하고 다시 일자리를 찾지 못해 방황할 때에, 돈이 없어 불안함과 비참함에 사로잡혔을 때에, 새로운 직장에서 사람 때문에 또 일이 너무 적성에 맞지 않아서 하루하루가 시무룩하고 사는 맛이 사라져 갈 때에, 그때야 비로소 그분을 찾고 의지하곤 했습니다. 기도를 하고, 성서를 읽었습니다. 다른 어떤 궁리를 하고 방법을 찾고자 노력해 보아도 풀리지 않는, 그 막다른 곳에 다다른 숨막힘을 느낀 후에야 절대자를 찾곤 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결코 핀잔을 주거나 내치지 않았습니다. 그 목소리를 생생히 들을 만큼의 믿음은 없지만, 적어도 궁지에 몰린 생쥐꼴이 된 저를 밀어내지 않았습니다. 고요히 저의 고통과 좌절을 지켜 봐 주는 평화로운 눈길이 있었고, 그 뒤로는 서서히 저의 마음이 온화해지고 담담해지곤 했습니다.


 사십 대 후반이 되어가는 저는 아직도 잘 살아가는 법을 잘 모르겠습니다. 남들하고 말할 때는 뭔가 있는 척, 제법 잘 살아가는 척하며 저의 모자람을 감춥니다. 감추어도 들킬 수 있습니다만 그 누구보다 제 자신이 잘 알고 있습니다. 별로 뾰족한 수가 없다는 걸, 그리 지혜롭지 못하다는 걸, 답을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다는 걸 말이죠. 하지만 그런 제가 마음을 조금 내려놓고, 조금은 낮은 자세로 그분을 찾으면 답답하고 막막하기만 했던 저의 생활이 이상하게 좀 풀리고 느슨해지는 경험을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구약의 지혜서나 집회서 같은 부분을 읽으며 하느님에 대한 참 믿음, 인간과 삶에 대한 통쾌하고 명확한 가르침에 대해 배우고 묵상할 수 있었습니다. 어찌나 가슴과 뒤통수를 때리는 공감을 많이 했는지 모릅니다. 매번 읽을 때마다 감탄하고 영감이 떠올라 자꾸 글이 쓰고 싶어질 지경이었습니다.


 이 글을 읽는 당신께서는 저와 같은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아 공감이 가지 않을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아니더라도 약해진 당신은 신 혹은 절대자의 존재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을 거라 믿습니다. 왜냐하면 삶이 그만큼 팍팍하고 힘들어서 어디 기댈 곳이 필요한 당신일 테니까요.


 만일 그러하다면 그 누군가에게 기대시길 바랍니다. 인간을 초월한 존재에 겸허한 마음으로 나 자신을 맡기고 평온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복잡하게 따질 것 없습니다. 일상에 찌들고, 사람에 치이고, 돈에 쪼들린 당신 자신을 고요함 속에 두고 당신이 기대고 싶은 존재 앞에 낮은 자세로 자신을 맡겨 보기를 진심으로 권유하고 싶습니다.


 치유가 될 것입니다. 삶의 평온함을 다시 찾을 수 있습니다. 일곱 배로 다시 보상받을 수 있습니다. 아니, 갚아 주시는 그분께서 그 이상으로 되돌려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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