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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드레아 Apr 22. 2020

책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임홍빈 옮김

남향에 대한 집착


 주말이면 1년을 살았던 오피스텔을 떠나 다른 동네로 이사를 간다. 중국에서 살 때 마지막 몇 년을 북향집에서 살았는데 그때 집안이 너무 추워 호되게 당한 뒤로는 줄곧 남향만 찾게 되었다. 이제 떠나게 될 문정동의 이 집은 커다란 통유리 창문이 남남동향으로 나 있는 곳이다. 아침부터 해가 질 때까지 햇살이 집안을 길게 비추어 주는 밝은 집이었다.


 다행히 새로 이사 가는 집도 남향이다. 내가 그렇게 집을 찾아다녔고, 그렇게 집을 얻은 것이다. 지금 있는 집의 주인이 세를 올려달라고 했는데, 몇만 원 차이지만 부담이 되었다. 더욱이 여기저기 돈 들어갈 데가 많아 보증금이라도 받아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라 지금보다 보증금이 반 이하에 월세도 낮은 곳으로 이사를 하기로 한 거다.



 며칠 뒤면 이 각도에서 이 거리 풍경을 볼 수 없을 것이다. 다시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조금 아쉬운 기분이 든다. 사진만 봐도 어딘지 대번에 알 수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 같다. 이 풍경을 보지 못하는 대신 새로 이사하는 집에서 보일 풍경을 상상한다. 그곳이 좀 더 한적한 데지만, 역시 남향이고 찻길을 바로 앞에 두고 있어 그리 큰 차이는 없을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라는 수필을 읽고 있다. 책 앞쪽에 스스로 쓴 기록을 보니 2014년 12월에 키타큐슈에 살고 있을 때 출장으로 방문한 손님께서 사다 주신 책이다. 집에 읽지 못한 책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였다.   


 생각해보면, 그런 관점은 소설가라는 직업에도 딱 맞아떨어지는 말일지도 모른다. 타고날 때부터의 재능이 풍부한 소설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혹은 무엇을 해도) 자유자재로 소설을 쓸 수 있다. 샘물이 퐁퐁 솟아나듯이 문장이 자연스레 솟아올라 작품이 완성된다. 노력할 필요 같은 건 없다. 그런 사람이 더러는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나는 그러한 타입은 아니다. 자랑을 하는 건 아니지만, 주위를 아무리 돌아보아도 나에게 샘 같은 것은 눈에 띄지 않는다. 괭이를 손에 쥐고 부지런히 암반을 깨고 구멍을 깊이 뚫지 않으면 창작의 수원水原에 도달할 수 없다. 소설을 쓰기 위해서는 몸을 혹사하고 시간과 노력을 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작품을 쓰려고 할 때마다 일일이 새롭게 깊은 구멍을 파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그와 같은 생활을 오랜 세월에 걸쳐 해가는 동안, 새로운 수맥을 찾아내고 단단한 암반에 구멍을 뚫어 나가는 일을 기술적으로나 체력적으로 효율성 있게 할 수 있게 된다. 그러니까 하나의 수원이 메말라간다고 느껴지면 과감히 바로 다음으로 옮기는 것이 가능하다. 자연의 수원에만 의지하고 있던 사람은 갑자기 그렇게 하려고 마음먹어도 그리 쉽게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중에서 발췌


 무라카미 하루키가 겸손한 사람인지는 모르겠다. 소설가가 되기 전에 도쿄 시내 어떤 곳에서 재즈 클럽을 운영하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불현듯 솟아올라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재즈 클럽을 경영하는 것과 비교할 수 없는 큰 성취를 소설가로서 이루어냈다. 그런 사람이 위와 같이 말하고 있다. 타고난 재능이 있어 문장이 샘물처럼 솟아나는 사람이 더러 있지만, 자기는 절대 아니라고 하니 말이다.


 하루키의 말에는 사람의 능력과 발현에 대한 깊은 통찰력이 담겨 있다는 생각이 든다. 감히 비교 불가능하지만, 알량한 나의 글솜씨가 조금씩이나마 나아졌던 지난 시간을 살펴보아도 그의 말은 꽤나 설득력이 있음을 느낀다. 예전부터 글쓰기를 좋아하는 편이었지만, 몇 년 동안 브런치 등을 통해 일주일에 몇 차례 완성된 글을 쓰는 일을 꾸준히 하면서 글을 쓰고 표현하는 능력에 있어 상당한 차이가 생겨남을 깨닫게 되었다.  


 일전에 이현세 작가도 맥락이 비슷한 말을 했던 적이 있었다. 젊은 시절 그림을 그리는 주변의 친구들 가운데 매우 타고난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매일 술을 퍼마시다가도 갑자기 '필'을 받고 하룻밤 사이에 그려낸 그림이 엄청난 작품이었다는 거다. 이런 사람이 만일 평생을 꾸준하게 타고난 능력을 지속적으로 갈고닦을 수 있다면 그것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축복이 아닐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신은 공평하다고 해야 할까. 대개는 능력이 출중한 사람들이 끈기와 지구력을 가지고 오랜 시간을 버티기 쉽지 않아 보인다. 오히려 타고난 능력에서 조금 밀리더라도 '엉덩이의 힘'으로 장시간 버티어 내며 다작을 하는 사람을 당해낼 수 없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다는 점이다.  

    

 소설이 아닌 수필로 하루키를 만나는 건 내겐 좀 드문 경험이다. 인터뷰 형식의 비소설인 언더그라운드라는 책도 침대 옆에 놓고 가끔 읽고는 있지만 말이다. 그러나 우연히 선물로 받은 이 책을 보면서 소설가로서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의 저자를 들여다볼 수 있어 참 좋다. 시대를 풍미하는 대작가를 대하는 거리감이 많이 줄어들고, 자신이 살아온 삶에 대해 담담히 이야기하는 그의 글을 읽으며 내 삶을 반추해 보게도 된다. 심지어 재즈 카페를 경영하던 그의 경영 노하우가 조금 서술되어 있는데, 그것도 독립해서 일하고 있는 내게 생각할 수 있는 자극이 되었다. 하루키의 문장을 읽고 있노라면 내 글이 쓰고 싶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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