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샐러리맨과 사업가 (2)

by 안드레아

H사장은 나보다 약 8개월 뒤에 같은 팀에 들어온 친구다. 이 친구도 같은 팀에 있을 때 옆에서 지켜본 바로는 일 하나는 기똥차게 잘 했었다. 165 정도의 자그마한 키에 안경 너머로 보이는 날카로운 눈매. 느릿느릿하게 말하면서도 찰진 그의 말투와 논리. 어떤 상황에서도 흥분하지 않고 침착하게 처신하는 태도.


그가 그렇게 빨리 회사를 그만두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듣자 하니 인도의 철광석 회사와 싱가포르의 대형 트레이딩 회사에서 억대 연봉의 스카우트 제의도 받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상해 주재원을 마치고 복귀할 즈음 난데없이 독립을 선언한 것이다.


보통은 어떤 확실한 거래 라인을 가지고 독립하여 자기 회사를 차리는데 H사장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회사에서는 그가 상해 주재 3년 반 정도 지날 무렵 본사의 팀장 자리가 비어 들어오고 했다는 것이다. 당시 Z사에 의해 합병된 회사는 점령군의 문화가 잠식해 들어오면서 상당히 갑갑한 분위기였다. 본사로 복귀하는 동료들마다 일하기 싫고 재미없다고 하소연하기 일쑤였다.


자기 주관이 확실하고 누가 간섭하는 걸 달가워하지 않는 그는 고민 끝에 퇴사를 결심했다. 그리고 그 결정은 다른 회사에 고용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오너가 되는 결정이었다.


지난 2년 간 그는 숨 가쁘게 달려왔다. 매달 꼬박꼬박 들어오는 월급이 없어졌지만 생활비며 교육비 집세 등등의 고정비는 매달매달 어김없이 발생했고 이것을 메우기 위해 그는 동분서주해야 했다. 원래 했던 철강 비즈니스뿐 아니라 돈이 되는 것이라면 이것저것 많이 시도했는데 특히 ‘영실업’이라는 우리 어릴 적 ‘킹콩’ 전자오락기 생산업체의 완구까지도 수입해서 중국 시장에 팔고 있다고 했다.


사업. 정말 회사를 다니면서 무수히도 생각했던 일이다. 몇 번이나 실행에 옮기려고 했던 적이 있었다. 정말 해외에서 샘플까지 받아와서 개인 Biz를 시작할 뻔했던 경우인데 바로 이란산 대추야자와 석류 원액 수입 Biz였다.


당시 이란 출장을 다니면서 Date라는 영어 이름을 가진 대추야자를 맛본 나는 '아, 이거 맛있다' 하는 생각에 수입 판매를 생각했었다. 그리고 2000년대 초반에 석류는 이미 한국 시장에 수입되어 인기를 끌고 있었는데 석류 원액을 수입하면 좋겠다고 판단했다.


대륙으로 둘러싸인 카스피해 북단 러시아 남쪽 항구에서 카스피해 남단 이란 북쪽 항구로 철강 반제품 빌렛을 한 달에 약 5만 톤 정도 삼국간 판매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3년 동안 출장을 3번 정도 갈 기회가 있었다.


그때 이란의 수입 Agent를 맡고 있던 나보다 열 살 위의 이란인 사업가 M은 이 철강 장사로 우리 측으로부터 매달 25만 불에서 30만 불에 달하는 커미션을 받고 있었다. 샐러리맨이라면 연봉으로 따져도 큰 액수인데 이걸 매달 꼬박꼬박 받았으니 지금 생각해보면 연간 약 300만 불이 넘었다. 나랑 같이 일했던 3년과 내가 중국으로 떠난 후 내 후임자들과 함께 했던 4년 정도를 합하여 최소 7년간 2,000만 불(대략 220억 원) 이상의 돈을 번 것이다.


일본으로 이직한 이후 작년 어느 날 저녁 이상한 번호의 전화를 받은 적이 있다. 바로 그 뜨겁고 치열했던 10년 전 전우 M이었던 것이다. 2007년 마지막 이란 출장에서 보고 못 봤으니 7년간 만나지 못했다. 그 특유의 모래가 섞인 듯한 카랑카랑하고 자신감 넘치는 목소린가 여전했다.


“ Andy! How’ve you been my friend! Doing good in Japan, Huh? I’d like to go to your place someday next year. ”


보통 대기업과 상대하는 Agent들이 대부분 대기업에 고분고분하고 을의 위치에서 상대를 대하는데 이 친구만은 달랐다. 내 전임자들의 경우 M한테 들들 볶이고 이거 해라 저거 해라 이건 안 된다 저건 안 된다 혼나기 일쑤였다. 내가 이란 Biz를 맡고 나서 이 친구와 통화를 하고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일을 해보니 과연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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