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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드레아 Jan 18. 2023

이제 시니어가 해야 할 결정이란

기로에 서서

 2000년 모 방송국 입사 동기를 오랜만에 만났다. 대학 졸업 후 첫 직장이었던 그곳에서 그는 PD로 일했고, 나는 기자로 일했었다. 23년이 지난 지금 그는 PD가 아니고, 나도 기자가 아니다. 동기 9명 중에서 가장 그곳을 먼저 탈출한 이는 나였고, 그는 몇 년 정도 일하다 진로를 수정했다. 화장기 전혀 없는 맑은 얼굴에 태어나길 짙은 쌍꺼풀의 큰 눈을 가진 여동생과 같은 이미지. PD라는 직업을 떠 올리면 으레 떠 올릴 인상과는 다소 거리가 멀었다.


 카페에서 일을 하다가 그의 직장이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걸 문득 생각해 내고는 점심번개를 제안했다. 굿 타이밍이라며 그가 반겼다. 직장 근처에 식당이 별로 없다며 안내한 곳은 내가 청소년기를 보낸 동네였고, 졸업한 고등학교가 코앞이었다. 우연한 일이었겠지만 사소한 기쁨이 곁들여졌다.


 몇 십 명 정도의 직원이 팀 단위로 일하는 직장에서 그는 이미 임원급으로 시니어 위치에 있었다. 이따금 만날 때마다 나이가 들고, 직급이 올라가면서 그가 느끼는 압박감과 고민을 접할 수 있었다. 아마 1년쯤 전에 만나고 가끔 톡만 주고받았으니 업데이트할 내용이 쌓여 있었다.   


 "그래가지고 말야. 이제 내가 하던 공공 쪽 일을 넘겨주고, 내가 혼자 신규사업을 맡게 되었잖아. 그전에 함께 일하던 팀원들이 7명이었는데, 갑자기 조직이 개편되면서 새로운 대표가 내가 하던 일까지 총괄하게 되고, 나는 아예 새로운 사업을 개발하고 추진하게 된 거지. 뭐, 아무것도 없이 무슨 주제 하나 나오면 거기서부터 내가 하나부터 열까지 다 챙기고 추진해야 하는 거였지." 그의 말속에서 부담감이 얼마나 컸을지, 얼마나 막막한 마음으로 일했을지 느껴졌다.


 "회사에서는 기존 조직을 이용해서 협업을 하라고는 했지만, 그게 말이 협업이지, 이미 난 그들의 헤드가 아닌 거잖아. 뭘 하려고 해도 그게 부탁인 거지. 옆 팀에 있는 팀장이 뭐 좀 해 봐 달라고 부탁하는 거더라고. 이미 내 직속부하도 아니잖아. 그래서 시니어들하고 회의도 해 봤지. 답이 없어. 안 나와. 당장 돈이 안 되는 신규사업을 위해서 얼마 없는 인원을 풀타임으로 투입할 수 없는 상황이거든. 그렇다고 내 아이디어가 막 당장 사업화 되고 새로운 매출을 일으키는 사업으로 크기에는 나 혼자만의 힘으론 완전 역부족이더라고."


"이제 떠날 때가 된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 벌써 이미 대표한테 말했어. 더 이상 같이 일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고. 대표는 그래도 사무실 같이 쓰고, 주소도 그대로 쓰고 여름까지만이라도 같이 일하자고는 하더라. 좋은 사람이야. 배려해 주는 거고. 물론 자기도 조직을 이끌어 가면서 내 도움이나 조언을 얻으며 했으니 갑자기 혼자 해야 하는 게 부담인 측면도 있었지. "


 친구는 이미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그러나 한 번도 걸어가 보지 않은 길을 앞에 두고 망설이고 있었으며, 두렵게 느껴지는 듯 보였다. 몇 년 전 같은 입장에 놓여 있던 나이기에 다는 아니어도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독립하면 법인을 세워 일할지, 개인사업자로 일할지 선택하게 될 거야. 각각의 장단점이 있어. 내 경우 무역 비즈니스는 법인으로 가고, 영어학원은 개인사업자로 시작했어. 이게 하기 전에는 귀찮고 어려워 보이는데, 막상 해 보면 또 별 게 아니야. 법인 설립의 경우, 혼자서 진행해도 되는데, 조금 비용을 들여서 대행업체를 써서 진행할 수도 있어. 내가 소개해 줄 수 있어. 세무사도 온라인으로 관리해 주는 업체랑 내가 도움 받는 업체 다 알려 줄게."


 딱히 그의 복잡다단한 일단의 걱정들을 덜어 줄 수 없었지만, '미지'로 인해 느껴지는 막연한 두려움은 떨쳐내라고 말해 주고 싶었다. 뭐든 시작이 어렵다는 것을, 안 해 봐서 귀찮고 힘들게 느껴지지만, 막상 해 보면 별 거 아닌 일들이 대부분이라는 것을 내 경험을 빗대어 알려 주고 싶었다.


 친구는 자신이 누군가와 함께 일하면서 더 에너지를 얻는 편이라고 했다. 독립하면 홀로 되는 것이 왠지 두렵고 걱정스럽다고 말했다. 직장에서 지지고 볶는 동료들이 없어지는 건 조금 허전한 일일 수 있으나, 결국 독립해도 일을 같이 할 상대가 항상 있을 거라고, 조금 형태는 다르지만 괜찮을 거라고 친구에게 말했다.


 아끼는 많은 친구들이 조금 빨리 혹은 조금 늦게 같은 상황을 맞닥뜨리게 된다. 이미 독립해서 일하고 있지만, 아직도 이런 변화에 직면했거나 직면할 친구들의 마음이 그대로 전해져 온다. 물론 독립했다고 끝날 일이 아니기에, 독립한 사람은 또 그 나름의 살 떨리는 사정이 있음은 말해 무엇하랴. 그저 마음속의 이야기들을 꺼내고, 고민을 주저리주저리 말하고, 현답은 아니지만 내 생각을 넌지시 말해 주고 친구의 생각도 듣는 시간이 꼭 필요하다는 것. 정확한 해답은 아니지만, 불완전한 사람이 그 불완전함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서로 마음을 모으는 시간. 지금은 이런 사람이, 이런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걱정만 하고 그 자리에 그대로 있지 말고, 조금 더 걸어가는 거다. 거기 가면 또 더 보이는 길이 나온다. 안갯속에 가려진 시야로 인해 이곳에서 나는 필요 이상의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생각과 실행을 같이 해 보는 거다. 해 보면 나온다. 지금은 보이지 않고, 생각지 못했던 그런 해법과 길이 말이다.


 그래도 친구의 표정이 좋았다. 걱정은 되지만, 나름 맷집이 있는 친구다. 우리 또 만나서 오늘처럼 수다를 떨며 이야기하자. 다음엔 내가 밥을 사마. 오늘 꼬막비빔밥은 참 맛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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