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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드레아 May 09. 2016

바지를 두고 와서

바지를 찾으러 갔다 오는 길

  아내와 아기가 일본집으로 돌아온 이후 모든 일상은 신속히 아기 중심으로 바뀌었다. 좋아하는 테니스도 못하고 글도 자주 쓸 수 없지만 포동포동하고 침 잘 흘리는 어린 딸을 안고 그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어느새 나는 바보가 되어 있는 것이다. 행복한 딸바보가.


  토요일 일요일 백일 된 딸과 정신없는 주말을 보내다가 갑자기 생각이 났다. 삼주 전쯤 집에서 차로 삼십 분가량 떨어진 테니스장에 보라색 면바지를 두고 온 게 떠올랐다. 남자 바지 치고 색감이 좀 야릇하지만 핏이 딱 떨어지고 질감이 좋아 즐겨 입던 바지였다.


  둘이었던 우리가 셋이 된 이후 일본에서는 첫 외식을 일본식 삼겹살과 비빔밥으로 아주 만족스럽게 한 후에 아내에게 물었다. 바지를 찾으러 갔다 와도 되겠느냐고. 아내는 처음에 난색을 표하며 나중에 가면 안 되냐고 하더니 잠시 뜸을 들인 후 다녀오라고 했다.


  내비게이션의 도움을 받고자 지난 목적지 목록을 찾아보았는데 잘 보이지 않아 그냥 감으로 찾아가 보기로 했다. 가는 길이 평소 좋아하는 온가강변도로여서 보너스를 받은 기분이 들었다. 온가강은 키타큐슈 시를 가로지르는 물줄기인데 폭이 눈짐작으로 대략 250~300미터 정도 되는 제법 큰 강이다.


  해가 진 직후 어둑해지는 강가의 풍경은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고
여유로운 기분이 들게 했다.

매번 이 강변도로를 달릴 때마다 지인들이 오면 꼭 이곳에 데리고 와서 구경시켜 줘야지 하는 생각을 한다. 서울에 살 때 한강변을 운전하며 지나던 풍경을 생각하면 사뭇 차이가 크다. 온가강변은 그야말로 시골 풍경이기 때문이다. 높은 빌딩은 단 한 개도 없고 그렇게 탁 트이고 멋진 풍경을 지닌 곳에 상점이나 식당도 하나 들어서 있지 않다. 아마도 이것은 시에서 정책적으로 막고 있는 게 아닐까 추측한다.


  온가강을 지나 작은 철교를 지나면 이제 곧 왼편으로 들어서야 하는 걸 기억했다. 그런데 철교를 지난 후 좌회전을 해야 할 곳을 우물쭈물하며 그냥 지나쳤다. 유턴을 해야 하는데 차들이 계속 뒤에서 따라오고 있어 그냥 직진하다 적당한 곳에서 들어가기로 했다. 그러는 사이에 전면 유리창에 빗방울이 하나둘씩 낙하하고 있었다.


  조금 돌긴 했지만 두 번 가본 루트라 어렵지 않게 카즈키 공원 테니스장을 찾아냈다. 이곳은 온가강에서 안쪽으로 약 5분 정도 들어간 곳에 위치한 공원인데 주변의 주택가와 야트막한 야산이며 논밭들이 정말 깔끔하고 정갈하게 조성되어 있다.


  주차를 하고 테니스장을 걸어간다. 원래는 해가 떠있는 아침이나 낮에 테니스를 하러 오던 곳인데 해가 진 후에 두고 온 바지를 찾으러 간다고 생각하니 느낌이 전혀 달랐다. 저녁이었지만 공원에는 가로등이 제법 켜져 있었고 무엇보다 테니스장 쪽은 나이트 게임을 즐기는 사람들을 위해 야간조명이 밝게 비추고 있었다.


  일층으로 테니장을 따라 길게 세워진 사무실 건물로 들어선다.


 "스미마셍, 산슈 구라이 마에까나, 와따시 즈봉오 와스레톳딴데스가..."

(실례합니다. 삼주 정도 전인가 제 바지를 잊어먹고 갔는데요.)


  테니스장 요금을 받는 사무실 카운터 입구에 난 작은 창문을 열고 안에 앉아 계시던 60대로 보이는 남자분께 서툰 일본어로 찾아온 경위를 말했다. 아저씨가 나를 한 번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문을 열고 나왔다. 사실 전에 탈의실에 두고 갔기 때문에 만일 거기에 그대로 있다면 바로 가서 찾아올 수 있지만 늦은 시간에 직원의 허락도 받지 않고 성큼성큼 들어가는 게 실례라 먼저 말을 꺼냈던 것이다.


  삼주나 됐는데 바지를 찾아가지 않은 것에 대해 이상하게 생각할 것 같아 아저씨가 묻지도 않았는데 출장이 길어져서 - 실은 바지 찾는 걸 까먹고 있어서 - 이제야 찾으러 왔다고, 좀 늦게 왔다고 겸연쩍게 덧붙이는 나. 60대의 안경을 낀 마른 체형의 아저씨는 나를 데리고 탈의실로 가주셨다.


  삼주 전 테니스장 탈의실에 두고 찾아가지 않은 남자의 면바지. 어떻게 됐을까?

바지를 찾으러 오면서 전화를 먼저 해보려고 했으나 일어 검색이 서툴러 운전 중에는 좀 무리였다. 에라, 그냥 가보자. 없어졌으면 할 수 없지. 내 예상은 바지를 테니스장에서 챙겨두었을 거라는 데 더 비중이 있었으나 시간이 꽤 지났기 때문에 없어졌거나 버렸을 가능성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탈의실 문을 열었다.


  바지가 있었다. 그런데 바지가... 바지가...

삼주 전 운동복으로 급히 갈아입느라 선반에 벗어던진 그 상태 그대로 있었다.


  예상 밖이었다. 바지가 없어졌거나 버려졌을 가능성은 생각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테니장측에서 보관하고 있을 거라고 예상했다. 그런데 뚜껑을 열어보니 보관은 보관인데 바지를 누가 집어다 보관한 게 아니고 그냥 벗어던진 헝클어진 바지 그 모양 그대로 선반에 놓여 있던 것이다.


  이런 비슷한 경험을 후쿠오카 한국 영사관 화장실에서도 했었다. 급히 볼일을 보고 화장실 휴지걸이 위에 지갑을 두고 왔던 적이 있었다. 38도 정도의 기온으로 뜨겁게 달아올랐던 지난해 여름 어느 날의 일이다. 새 여권을 신청하고 영사관을 떠난 후 편의점에 들러 반신용 봉투를 사려고 하는데 지갑이 없어진 걸 발견했다. 급히 주차해 놓은 차에 가서 살펴보고 영사관에도 들러 접수처 직원에게도 물어보고 접수처 앞 내가 앉았던 소파도 살펴보았으나 지갑을 찾을 길이 없었다. 거의 한 시간 정도를 엄한 곳만 헤매다가 화장실을 나중에서야 생각해냈다. 땀을 삐질삐질 흘린 후 당황한 마음으로 들어간 화장실 안에서 나는 환희를 느꼈다.


  지갑이 움직이지 않고 휴지걸이 위에 내가 놓은 모습 그대로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테니스장 직원 아저씨는 보라색 바지를 가리키며 저기 있는 거 맞냐고 물으셨고 나는 기쁜 표정으로 맞다고 제 거라고 말씀드렸다. 그제야 아저씨는 씨익 웃음을 지어 보이며 웬 바지가 삼주 동안 주인이 찾아가지 않고 있나 생각했다고 말했다.


  우리나라에서도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다시 찾은 적이 많긴 하다. 그런데 그렇게 찾았을 경우엔 물건이 잃어버린 상태 그대로 있기보다는 그곳의 누군가가 찾아서 보관소나 경비실 같은 곳에 맡겨놓은 상태에서 찾은 경우가 많았다. 희한하게 일본에서는 똑같이 물건을 되찾은 것이지만 그 물건이 잃어버렸던 당시 상태 그대로 누가 손을 대지 않은 채 되찾게 되는 경험을 몇 번이나 하게 됐다.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약간 감탄스러웠다. 이런 게 가능하다는 것이.


  일본이라는 나라를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좋은 점도 나쁜 점도 조금씩 조금씩. 경탄할 만한 일도 아쉬운 일도 하나씩 하나씩. 한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 살다 보니 이 세 나라가 내 삶 속에서 섞이게 되었다. 그냥 단순히 일적으로만이 아니라 생활 자체에서 말이다.


  바지를 찾아서 돌아오는 길도 일부러 온가강쪽을 택해서 왔다. 강변의 밤 풍경을 보며 드라이브를 하기 위해서였다. 돌아오는 길도 한 번 길을 잘못 들어 차 한 대 지나갈 만한 좁은 논길로 들어섰다가 후진으로 쭈욱 빽해서 돌아나왔다.


  앞으로 10년 이상 살게 될 이 나라. 이 마을. 이방인인 나와 아내 그리고 어린 딸은 또 어떤 일들을 경험하며 일상을 채워가게 될까. 오늘처럼 기분 좋은 일들로 채워진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 지난날 중국에 살면서 중국을 사랑하게 되었 듯, 나는 일본이라는 나라도 사랑하게 되지 않을까 느껴보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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