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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드레아 May 21. 2016

100m 달리기와 그 여자애

가슴이 터져 버릴 것만 같았던 그때

  누군가를 그토록 오랜 시간 좋아했던 적이 없었다. 중학교 2년, 고등학교 3년 무려 5년을 내리 한 여자애를 좋아했었다. 같은 중학교를 다녔으며 같은 성당을 다녔던 그 아이.


  피부가 까무잡잡했다. 달리기를 꽤나 잘 했다. 총명한 아이였다. 단독주택에 살았고 언니가 둘 있었다. 데생을 곧잘 했고 중학교 당시 성당 친구들끼리 즐겨하던 고우백점프, 공공칠빵, 광고게임 등에 능한 소녀였다.


  그 아이는 한눈에 반한 경우가 아니었다. 성당에서 그리고 학교에서 자주 생활을 공유하며 점점 마음에 들어와 결국에는 내 마음을 꽉 채워 버렸던 소녀다.


  어떻게 그 애의 집전화번호를 알게 되었다. 아마도 단짝 친구한테 물어본 것 같다. 직접 물을 용기가 모자랐다.


  처음 전화를 걸었을 때의 느낌이 아직도 남아 있다. 수화기를 들었다. 가슴이 떨려 이내 수화기를 내렸다. 잠시 후 호흡을 가다듬고 다시 들었다. 번호를 누르고 나자 예상보다 큰 소리로 신호음이 울렸다.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신호가 계속 울리다가 딸깍 누군가 받았다.


"여보세요?"


" 여보세요? 거기 윤지네 집이죠? 안녕하세요? 저 윤지 성당 친구 훈주라고 하는데요. 윤지 있으면 좀 바꿔 주세요. "


  다행히 부모님이 아니라 언니가 받은 것 같았다. 잠시 후 그 애가 수화기 저 편에 등장.


" 여보세요? 아, 훈주구나. 우리 집 전화번호 어떻게 알았네. "


  그 애의 단짝 친구 이야기를 꺼내며 변명조로 해명했다. 그리고 준비해둔 전화의 목적을 숨 가쁘게 읊어댔다. 마치 그것 때문에 전화를 했다는 식의 분위기를 풍기며.


  " 윤지 너 내일 새벽에 평일 미사 갈 거니? 갈 거면 상어 아파트 상가 입구에서 5시 45분에 만나서 같이 갈래? 지선이랑 준구랑 형민이도 온대. "


  사실 그 애가 평일 미사를 갈 거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알면서 전화한 거다. 확인 사살의 의미도 있었지만 그냥 전화를 걸고 싶었던 거다. 목소리를 듣고 싶었고 나의 관심을 표현하고 싶었다.


   짧은 통화를 마치고 수화기를 내린 나의 가슴은
수소를 불어넣은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상태였다.  

전화 통화를 했다는 사실이 너무 뿌듯했다. 그 애가 내 전화를 받았을 때 아주 기뻐하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싫은 기색도 아니었다고 느껴졌다.


  그 뒤로도 조그마한 구실이 생길 때마다 아니, 스스로 이유를 만들어서 전화를 하곤 했다. 아쉬운 건 그 애가 나한테 전화를 한 기억이 없다는 거다. 참 일방적이었다.


  중학교 재학 당시 나는 100m와 110m 허들 단거리 육상 선수였다. 중학교 때 100m 대회 최고 기록이 11.04초였던 나는 강남구에서만 몇 번의 우승을 했고 서울 대표 선수가 되어 소년체전에도 출전했다.


  단거리 달리기 대회에 출전해 봤거나 적어도 학교에서 100m 달리기를 해본 기억이 있다면 스타트라인에 섰을 때의 느낌을 알 것이다. 특히 정식 대회에 나가 스파이크를 신고,  엎드려 두 손을 스타트라인에 맞춘 후, 엉덩이를 들어 올린 자세에서 총소리가 울리기 직전까지의 그 순간. 엄청난 양의 아드레날린이 온몸에 휘몰아치며 극도의 흥분 상태가 돼 버리는 그 순간. 가슴은 쿵쿵! 쿵쿵! 어마 무시하게 두방망이질을 해댔다.


  어쩌면 내게 있어 그 애한테만 향했던 5년이라는 시간은 바로 이 100M 경기 스타트 직전의 짧디 짧은 그 폭풍우 몰아치던 순간의 다름 아니다. 작은 그 애의 반응, 표정과 말 한마디 한 마디가 나를 하늘로 올려놓기도 늪으로 깊숙이 밀어 넣기도 했다.


   소망했다. 언젠가 때가 되면 그 애 곁에 내가 설 수 있기를. 아직은 그 애한테 부족하고 모자란 듯 느껴지는 나 자신이었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생이 될 즈음엔 그런 때가 올 것으로 믿었다. 막연히 그렇게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나의 어린 시절.


   모두가 잠든 료칸의 0시 33분. 홀로 텅 빈 료칸의 응접실 소파에 앉아 고요함에 몸을 맡겼다. 유독 물소리만이 제법 큰 소리로 귓전을 때리고  쉴 새 없이 흐르는 물소리는 아스라한 기억을 불렀다. 그 애가 생각났고, 그 애만 바라보던 어린 시절의 내 모습도, 가슴이 터져라 경기장 트랙을 질주하던 중학교 시절의 내 모습도 함께 떠올랐다. 그립기도 하면서 한쪽 가슴이 아직도 찌릿찌릿 아리는 이 느낌.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면 또 한동안 잊고 지내겠지.


   

* Photos 1,2,3
   taken by 철길위에강가딘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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