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이든 다른 명절이든 가족이 모이면 꼭 나오는 질문이 있다. 나는 왜 기자를 그만두었는가. 나에 대한 다른 여느 질문과 마찬가지로 엄마는 대변자가 되어 내 체력을 도마에 올린다. 내 체력이 약한 건 사실이다. 종일 사무실에 앉아 일하는 지금도 퇴근길엔 물 먹은 종이처럼 축 늘어지니까. 기자 생활이 체력적으로 힘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짧은 기간 기자로 일하며 디스크, 족저근막염 등 몇몇 만성질환을 얻었다.
하지만 기자 일을 그만둔 이유를 체력에 물을 수는 없다. 내가 기자를 그만둔 것은 조금 더 근본적인 데, 이 업이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냐는 질문에 있다.
기자로 일한 일 년 반은 내가 기자가 아니라 여기자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시간이었다. 나는 외모와 성적 매력을 이용해 취재하라는 조언과 여기자이기 때문에 다를 거라는 의심을 받았으며 끊임없이 외모로 평가받았다. 바로 앞에서 유흥 업소에 대한 이야기가 아무렇지 않게 오갔다. 동종 업계에서 일하는 여기자들은 외모로 줄 세워졌고 당사자가 없는 자리에서 성적 농담의 소재로 쓰였다. 업계 내 기자가 아닌 여성들이 겪었다는 성희롱과 성추행은 수도 없다. 내가 듣지 못한 이야기는 더 많을 것이다.
자존감이 떨어졌다. 아무리 열심히 취재하고 공들여 기사를 써도 돌아오는 건 외모 이야기뿐이었다. 술자리에 참석하면 홍일점의 역할을 기대하거나, 뭐라도 해보려는 이들을 만났다. 취재원과 관계를 형성해 취재 기반을 형성하고 의문에 답을 구하는 게 일이었지만, 일을 잘해도 일로, 능력으로 평가받을 수 없었다. 취재원과 가까워지면 왜 나에게만 잘해주냐는 질문이 들어왔다. 어려운 취재를 해내면 어떻게 나만 해냈냐는 물음이 돌아왔다. 왜와 어떻게 뒤에 은근슬쩍 숨은 함의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았다. 알았지만 모른 척했다. 덕분에 순진하다는 칭찬을 덤으로 얻었다. 나는 기자이고 싶었지만 어리고 예쁘고 순진한 여자로만 가치를 인정받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웃어 넘기기와 감사하다고 말하기가 전부였다. 비슷한 시간을 견디는 이들과 경험을 나누고 조심해야 할 사람을 공유하는 정도였다. 취재원 혹은 선배와의 관계와 업계에서의 입지를 생각하면 거칠게 반응할 수 없었다. 불편하다는 기색을 내비쳐도 통하지 않았다. 오히려 칭찬, 조언을 왜 삐딱하게 받아들이냐는 식의 핀잔이나 페미니스트냐는 식의 비아냥이 돌아왔다. 페미니즘에 대해 깊게 생각해본 적이 없는 때이지만 그 단어가 내 입을 다물게 하는 용도로 쓰였다는 것은 알았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선이 과연 어디 있는지 모르겠으나, 과하지 않은 선이라면 묵인하는 게 맞다, 회사도 보호해주지 않을 거라는 불문율이 있었다. 용기를 낼 수 없는 분위기였다.
최근의 미투 운동을 생각한다. 미투 운동이, 페미니즘 바람이 삼사 년만 일찍 시작됐다면 나는 아직 기자로 일하고 있었을 것이다. 나의 상황과 처지에 대해 말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을 테니까. 외모를 칭찬하고 그게 내가 갖춘 기자로서의 자질이라고 말하는 이에게 차마 당당하게 항의하지는 못할지라도 농담 섞어 핀잔주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었을 테니까.
“요즘 어디 가서 그런 말 하면 큰일 나는 거 아시죠?”
별거 아닌 이 말이 과거의 나는 그렇게 뱉기 힘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