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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금 Oct 07. 2018

내가 예뻐진 대신 잃은 것

거울 앞에 서있는 시간은 제곱으로 는다

지난달 오래전에 예약한 퍼스널컬러 진단을 받았다. 색채 전문가가 내 얼굴에 색색의 천을 대가며 가장 어울리는 색을 꼽아줬다. 전문가에 의하면 내 퍼스널컬러는 가을 뮤트로 회색끼가 도는 파스텔 색이 잘 어울린다. 평소 멀리하던 연한 분홍이나 노랑 같은 색들이다.


놀랍게도 전문가의 조언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후부터 '예뻐졌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핑크색이 도는 메이크업베이스와 mlbb 컬러 립스틱에 블러셔는 살짝 진하게 얹는 것만으로도 칭찬받는 일이 늘었다. 태세를 이어 옷을 몇 벌 샀다. 그가 추천해준 색과 질감으로. 정해진 색 내에서만 옷을 사니 옷을 고르기가 쉬워져 쇼핑에 재미가 붙었다.


좋은 변화일까? 거울을 들여다보는 순간순간 머릿속에 물음표가 차오른다. 스스로에게 하는 질문이다.

Walter Crane, The Mirror

요즘 나는 출근 전 화장에 공을 들인다. 늦잠을 자도, 지각할 위험이 있어도 모든 단계를 챙긴다. 능숙하지 않아 화장하는 데만 20분 정도가 걸린다. 출근길에 쇼핑 앱을 뒤적인다. 퍼스널컬러에 맞는 옷이 별로 없어 옷을 좀 장만해야겠기 때문이다. 그도 아니면 유튜브로 화장법 동영상을 본다.


원래 나는 비비크림에 눈썹만 그리고 집을 나섰다. 립스틱은 지하철에서 발랐다. 출근 준비에 30~40분이면 충분했다. 그중 화장은 5분도 채 차지하지 않았다. 이마저 줄여 선크림만 바르고 나가는 날을 늘려가는 중이었다. 남는 시간에는 아침을 먹었고, 그날 출근길에 읽을 책을 꼼꼼히 골랐다. 출근길에는 책을 읽었다. 출퇴근 길에 읽는 책만 해도 일주일에 2~3권은 됐다. 독서량의 대부분을 지하철에서 채웠다. 지금 출퇴근용 가방에는 일주일째 같은 책이 있다.


모든 칭찬은 족쇄다. 인정받고 싶은 건 인간의 당연한 욕구이기에, 어떤 칭찬이든 듣는 순간 기대에 부응하고 싶어 진다. 칭찬받은 버전의 나는 일종의 기준이 된다. 그만큼은 해야 한다는, 그에 미치지 못하면 후퇴하게 된다는 기준 말이다.


나는 퍼스널컬러 진단 덕에 '더 예뻐졌다'는 칭찬을 받게 됐다. 블러셔를 바르고 연한 핑크색 옷을 입은 내가 다른 버전의 나보다 예쁘다는 걸 알게 됐다. 그 덕에 아침 식사를 못 하면서도 화장 단계를 줄이지 못하고, 이미 옷이 충분한데도 새 옷 사는 데 돈을 쓴다. 그리고 거울 앞에서 더 오랜 시간을 보낸다.


거울을 보고 있으면 삐쭉한 눈썹, 뺨 위에 점 같은 결점들이 하나둘 눈에 들어온다. 미처 몰랐던 것들이다. 결점을 알았으면 보완해야 하는 법. 눈썹을 다듬고 컨실러로 점을 가리느라 전보다 거울을 더 오래 본다. 거울 앞에 서있는 시간은 제곱으로 는다.


예뻐진 대신 외모에 쏟는 시간과 돈, 외모로 받는 스트레스가 늘어난 셈이다. 좋은 걸까? 예뻐졌으니 된 걸까?


그래서 나는 외모를 놨다. 핸드폰에서 쇼핑앱을 지우고 메이크업베이스를 비롯한 각종 화장품을 화장대 서랍 깊숙이 밀어 넣었다. 쇼핑에 쓰려던 돈으로는 새 책을 샀다. 다시 아침을 든든히 먹고 꼼꼼히 고른 책을 가방에 넣어 출근길에 오른다. 자주 시간을 내 어떻게 하면 내가 진짜로 행복해질 수 있는지 곰곰이 생각한다. 기준, 틀, 코르셋 - 뭐라 부르든 외모 강박에 쌓여서는 행복해질 수 없다는 걸 깨달은 덕이다.


사실 이건 거짓말이다.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던지게 되는 질문의 대답이 NO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여전히 거울을 들여다보며 시간을 보낸다. 거리에서 마주치는 맨 얼굴의 여자들을 부러워하면서도 수시로 거울을 들어 화장 상태를 살핀다.


덜 예쁜 버전의 내가 될 용기가 없는 탓이다. 립스틱 하나 안 발라도 온갖 질문이 날아온다는 걸 잘 아는 탓이다. 어디 아파? 무슨 일 있어? 안색이 안 좋네? 급하게 나왔어? 늦잠 잤구나? 이런 질문을 수시로 받게 되면 자연히 생각하게 된다. 화장한 내가 정상, 안 한 내가 비정상이라고. 우리는 이미 태어난 그대로의 자연스러운 얼굴에 맨얼굴, 생얼, 노메이크업 등의 이름을 붙이지 않나.


그냥 조금 과감해지면, 용감해지면 어떻겠냐고? 나는 먼저 사회가 바뀌기를 희망한다.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남의 외모에 신경을 끄고, 외모 말고 다른 걸 얘기하면 된다. 최근에 본 영화, 좋아하는 작가, 즐겨 듣는 음악 - 이 셋 중 하나만 골라도 대화는 충분히 이어진다. 게다가 이렇게 하는 데에는 어떠한 용기도 필요하지 않다. 외모에 가려진 상대의 진짜 모습을 알 수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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