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예민함
우리가 가진 다양한 특성들은 사회적인 맥락 안에서 이해되고 평가받기 마련이에요. 예민함이라는 말은 뚜렷한 형체나 근거 없이 '좋지 않은 것'을 지칭하기 위해 쓰는 경우가 많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탑재되어 선택할 수 없었던 것임에도 말이에요. 그러니 예민한 사람들은 유전자 뽑기의 대가를 감당하는 억울함이 있을 수밖에요. 불가피하게 무던함을 흉내 내고 그 시간들이 쌓여 지치고 외롭고.. 예민한 스스로가 세상에서 가장 싫어지고. 왜 나만 힘들고 유별날까에 대한 자책과 자기 비난의 탑이 쌓여버리지요. 이럴 때 예민함은 나쁘거나 잘못된 것이 아니며, 예민한 채로 잘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그 첫 단계로 예민함에 대해 제대로 알아보는 것부터 시작할게요.
사전적 정의부터 살펴보는 것은 무척 식상한 레퍼토리로 보일 수 있겠습니다만.. 눈에 보이지 않는 성품이나 성향을 말하려면 대관절 무슨 뜻인지 알아보는 것은 필요하다고 봐요. 진리는 항상 기본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처럼요.
예민하다 (銳敏하다)
1. 무엇인가를 느끼는 능력이나 분석하고 판단하는 능력이 빠르고 뛰어나다.
2. 자극에 대한 반응이나 감각이 지나치게 날카롭다.
3. 어떤 문제의 성격이 여러 사람의 관심을 불러일으킬 만큼 중대하고 그 처리에 많은 갈등이 있는 상태에 있다.
(출처: 네이버 국어사전)
어머! 보세요. 첫 번째 정의는 판단 능력이 빠르고 뛰어나다는 거예요. 흔히 들었던 예민함에 대한 핀잔과는 달랐습니다. 뜻에서 알 수 있듯 '예민하다'라는 단어는 좋다/나쁘다, 옳다/그르다로 볼 수 없는 그야말로 중립적인 언어로군요. 사용하는 맥락에서 부정성을 더 많이 띨 뿐이었어요.
아래에서 조금 더 살펴볼게요.
미국의 임상심리학자인 일레인 N. 아론은 '매우 예민한 사람(highly sensitive person; hsp)'이라는 개념을 최초로 제시했어요. 외부 자극의 미묘한 차이를 알아차리고 복잡하고 다양한 환경 자극에 쉽게 압도되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즉 이런 거예요. 상대적으로 둔감하고 무딘 사람들은 인파가 북적이는 곳에 갔을 때 눈에 보이는 대로, 심플하게 '사람이 많네'라는 생각을 하고 큰 불편함 없이 그 장소에 머무를 수 있어요. 반면 hsp(매우 예민한 사람)는 어떨까요? 일단 사람이 많다?
▶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의 생김새, 느낌, 냄새, 북적거림 특유의 느낌이 입력됨 (자극, 정보의 과입력)
▶ 불쾌함이 스멀스멀 감지 (입력된 것을 빠르게 느낌)
▶ 주변의 사람과 환경 그로 인한 피로감에 에너지가 깎임 (자극으로 인한 여파가 큼)
▶ 집에 가고 싶다(혹은 여기서 얼른 벗어나고 싶다고)고 생각함 (회피, 행동 억제 반응이 강화)
정리하자면 사람이나 환경에 대한 자극이 지나치게 많이 입력되고(원하지 않더라도), 받아들인 자극과 반응에 대한 역치가 낮아 빠르게 불쾌함이나 위험을 겪게 되며, 이로 인한 에너지의 소모가 크고, 과잉 자극의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행동이 반복&지속된다고 볼 수 있어요.
반면 예민한 사람 중 30%는 외향적이고 사교적인 경향이 강하다 하는데요, 미국의 심리 코치인 멜로디 와일딩은 '예민한 노력가(성취 욕구가 높고 동시에 자신과 타인에 대해 민감하게 대응함)'라는 개념을 제시하기도 했어요. 더 나아가 정신과 전문의 주디스 올로프는 더 높은 수준의 민감성을 지닌 사람들의 특징을 정의합니다(초민감자-타인의 감정뿐 아니라 에너지와 신체 증상까지 그대로 받아들임). 이처럼 예민함 또한 다양한 모습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지요.
A
모험적인 일은 되도록 피하고, 익숙하고 안정적인 환경 선호
결정 및 판단 내리기 전 오래 숙고하며 여러 측면을 신중하게 살핌
작은 일에도 걱정이 많고 특히 낯설고 불확실한 상황을 힘들어함
속내나 감정 표현을 잘하지 않으며 관계의 폭이 좁음
B
성취에 대한 기준이 높고 생산성에 몰두함
변화에 민감하게 대응하며 타인의 요청에 응하려 애씀
감정의 폭이 크며 정서 반응이 복잡함
요청에 대한 반응과 자기 보호 사이의 갈등으로 인해 잦은 소진감 경험
C
자연과 영적인 것이 높은 가치를 둠
동물이나 식물의 상태를 민감하게 파악함
타인의 고통을 스스로의 고통과 구분하지 못해 힘들어함
소음, 강한 냄새, 밝은 빛이 지대한 영향을 미침
쨔-잔. 임의적으로 A, B, C를 분류해 보았어요. 전통적 HSP가 A, 예민한 노력가는 B, 초민감자는 C에 가까운 듯합니다. 물론 분류가 무색할 만큼 모든 특성이 나를 설명한다고 여길 수 있겠으나 '조금 더'나에게 가까운 것이 무엇인가를 살펴보는 것도 좋을 거예요. 제 경우 B에 조금 더 가깝긴 해요. 일단 성격이 급한 데다 자극추구형이라 차라리 더 스트레스받더라도 무언가를 해내는 것이 좀 더 중요하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고요하고 안락한 일상을 꾸리기보다 유약한 심신을 잘 다스리고 하고자 하는 것과 현 상태를 끊임없이 조율하는 것이 더 맞는 방법으로 여겨져요. 항상 중요한 것은 '균형'이거든요. 구태여 이런 디테일에 접근해 보는 까닭은 각자의 예민함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함입니다. 조금 더 자세하게 들여다볼수록 나 자신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지고 결국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다 하는 효과적인 방법을 모색할 수 있으니까요! 각자의 예민함을 각자의 방식으로 요리한달까요.
차근차근 각자만의 예민함을 잘 알고 다룰 수 있게 될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