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정하고 아름답지 않아도

아무튼, 예민함

by 단아

어떤 사람을 상상해 봅시다. 대체로 능수능란해요. 누군가 자신을 싫어하더라도 크게 신경 쓰지 않죠. 좌절과 어려움을 겪어도 툭툭 털어냅니다. 겨울 난방비 고지서에 전전긍긍하지 않는 건 덤이죠. 마음을 베푼 것에 대해 반드시 돌려받고자 하거나 억울함을 쌓지 않아요. 한 마디로 매끈하고 쿨한 사람입니다. 자, 누구일까요? 실제 만나본 적 없는 상상 속에 존재하는 가상의 인물이에요. 그의 주된 역할은 저를 기죽이는 것. 아, 오해하면 곤란해요. 이 사람은 그냥 (상상에서) 존재당했을 뿐이거든요. 열심히 소환하는 것은 저 자신입니다. 대체로 꿈꾸던 덕성들을 고루 갖추고 있는 허상인 거죠.


그런데 말이에요. 언제부턴가 이 사람에 대한 질시가 없어졌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예전보다 덜 좋아 보여요. 게다가 사랑스럽지도 않아요. 누군가의 사랑스러움은 마음을 쓰고 전전긍긍하며 감정에 대해 깊게 고민하는 모습에서 나올 때가 많지요? 허술함과 결핍이 귀여움이 되기도 하고 우리는 생각보다 빈틈 많은 사람을 애정하지 않나요. 생각이 이어집니다. 참 오래도록 허상에 매달려 왔어요. 내면의 개복치에게서 도망치려 할수록 달라붙던데 계속할 이유가 있을까요? 그러니 다른 선택을 하는 것이 더 좋을 거예요. 애써 부정하기보다 좀 봐주면 어떨까 싶습니다. 예민함을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약간은 친절하게 대할 수 있을 거니까요. 힘을 좀 뺄 순서예요. 예민한 것은 예민한 대로 두고, 조련하는 방향으로 접근해 보려고요. 이게 변화의 신호탄이 아니고 무엇이겠어요?


"당신이 튤립이라면 장미가 되려 애쓰지 마요. 대신 튤립 정원을 찾아가세요."



변증법적 행동치료의 창시자인 마샤 리네한 선생님의 말이에요. 무척 사랑하는 표현입니다. 예민함 자체는 잘못이 없지요. 단지 불편했기 때문에 미워했을 뿐이에요. 예민함은 둔감함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 예민함을 받아들이고 예민함의 정원을 가꿔야 했어요. 예민함을 알아차리고, 제대로 이해하고 화해하며, 예민함과 어떻게 함께 살아갈지에 대해서 선택해야 했어요. 시도해 본 적 없는 일이라 시행착오가 많았어요. 이것도 나름의 변화인지라 습관처럼, 하던 대로 하지 못하는 불편함이 컸어요. 항상성과 저항을 제대로 실감했답니다. 꾸역꾸역 계속했어요. 확신이 있었다기보다 이왕 다르게 살아보기로 한 거 계속해보자는 오기가 컸거든요. 제게 맞는 방향인지 점검하는 것도 필요했어요. '나는 나의 예민함을 사랑해!(X)'가 아닌, '예민한 건 그럭저럭 괜찮아(O)'여야 했답니다. 야단스럽게 다정하지 않지만 담담하게 자신을 돌볼 수 있게 되었어요. 자연스럽게 타인의 아픔과 상처에 대한 이해의 폭이 커졌고, 함께 더 견딜 수 있게 되었어요. 그저 '나'의 꼴을 조금 받아들인 것으로 말이죠.


사람은 참 기묘한 존재예요. 인간의 뇌가 하는 일은 놀랄 만큼 고기능인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허술하기 짝이 없거든요.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거나, 감정이 서려 있는 과거에 대해 지나치게 몰두해 버려요. 하지만 또 상처를 대하는 태도를 달리 하고 연습하면 또 다른 방향으로 변할 수 있어요. 이 불완전함이 수많은 희로애락을 만들어내다니. 엉망진창의 아름다움이에요. 바로 이런 점이 사람에 대한 호기심과 애정을 이어나가게 하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예민한 채로 잘 살기. 이제 이 과정에 대해 본격적으로 이야기해 볼게요.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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