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뚤빼뚤한 마음
지브리 스튜디오의 원령공주(모노노케 히메)를 좋아한다. 몇 번을 봤는지 모르겠다. 자연의 무자비함과 생과 사의 랜덤성 잘 그려내서 좋다. 챠밍 포인트가 괴랄함을 인정한다. 아무튼 자연과 공생하며 삶을 이어온 동물과 일족의 신이 있었다. 하지만 무리 지어 살고 개척이라는 명목 하에 성실하게 자연을 파괴하는 인간으로 인해 터전이 파괴됐다. 이들 입장에선 억울하고 분통할 수밖에.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해 한을 품고 재앙신이 되는 것도 자연스러운 수순으로 보인다. 거기에 사슴신은 옷코토누시의 생을 거둔다. 아시타카의 생을 이어준 것과 대비된다. 이번엔 인간 등장인물을 보자. 아시타카와 산은 동물과 인간의 경계에 있는 존재이다. 선의와 올바름을 인간으로 빚어낸 아시카타도 재앙신의 저주를 피해 갈 수 없었다. 이게 잔인한 무작위성의 결과다. 자연은 어떤 대상 선함의 유무와 관계없이 일어날 일은 일어나게 한다. 에보시라는 등장인물도 있다. 자급자족을 위한 생산, 총포의 개발 등으로 자연을 파괴하는 일등공신이다. 그런데 집단의 수장으로서 도리를 다할 뿐만 아니라 병들고 소외된 이들까지 헤아린다. 인간의 입장에서는 좋은 지도자, 그야말로 성군이다. 혼란스러운 양면성이다.
이제 괴팍한 취향을 해명할 차례다. 일단 선한 일 하면 선한 결과가 온다는 당연한 클리셰를 비튼 것이 신선하다. 선함의 가치와 의미를 깎아내리고자 하는 건 절대 아니다. 무작위성 안에서의 희로애락, 그럼에도 함께 살아가려는 의지를 읽을 수 있어서 좋은 거다. 생명은 태어난 이상 죽는다. 이게 삶의 불변의 진리다. 그리고 죽음에는 특별한 이유가 없을 수 있다. 존재의 해악은 상대적이며 자연은 자비롭지 않다. 하지만 그 안에서도 기어코 자신이 할 일을 찾고 그 의미를 이어간다. 산과 아시타카의 사랑처럼, 상대의 방식을 존중하면서 말이다. 항상 이런 포인트에서 인간의 생명력을 느끼고 감탄하게 된다.
즉 '어쩔 수 없는'것을 가슴 아프게 받아들이며 한 발짝 내딛는 모습이랄까. 인간의 아름다움은 상처나 좌절 하나 없이 매끈하고 반듯한 것에서 온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완전무결한 육각형의 모습도 더더욱 아니다. 존재의 귀함은 선택할 수 없었던, 선택하지 못했던 것으로부터 어떻게 살 것인지를 스스로 정하는 것에서 나온다. 열심히 노력해도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수 있다. 간절히 원한다 해도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이게 성실하고 선하게 살지 말아야 할 이유가 되진 않는다. 어차피 우리는 삶에 던져진 존재이며, 삶의 방식을 선택하고 살아내는 과정에서 자존이 뿌리내리고 존재의 고유함이 증명되니까.
예민함도 내가 고른 게 아니다. 고를 수 있다면 골랐겠는가 말이다! 하지만 예민하게 태어났다. 내면을 탐구하던 시기엔 외부 환경(-가정환경, 양육자와의 관계, 경제적 상황 등등)이 나를 이렇게 만든 것이라 여겼다. 일부만 맞는 추론이었다. 나를 둘러싼 대부분의 핏줄들이 예민하니 예민함이 발아된 것은 당연지사. 게다가 이유를 찾아봐야 뭐 하는가. 많이 양보해서 가정환경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 치자. 그렇다고 내가 순해지느냐? 아니다. 원망하면 속이 풀리나? 안 풀렸다(해봐서 안다). 결국 할 수 있는 건 억지로라도 예민함을 받아들이는 거였다. 예민하지만 할 일을 하자. 예민하니까 컨디션 관리를 잘하자. 예민하니까 무리해서 사람을 만나지 말자(어쩐지 체크리스트로 가득하다..). 예민하니까 특별한 이유 없이 지칠 수 있음을 받아들이자(아직 못 받아들였다). 그러다 보니 예민해서 할 수 있는 일을 하자로 바뀌었다. 이건 좀 뿌듯하다. 스스로를 견디고자 선택한 것이 나 아닌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는 점이.
아무튼. 이러저러한 생각을 이어가는 예민한 사람이자 상담자로 살아가고 있다. 자주 스스로를 견디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