얀 아셀레인은 막연히 봄만 꿈꾸는 이들에게 붓칠로 메시지를 전한다
지난해 봄날 오후 늦게 큰 딸과 함께 동네의 작은 운하길을 산책했다. 아직은 쌀쌀한 기온이지만 그래도 따사로운 햇빛을 가끔이나 느낄 수 있어서 봄을 애써 느끼곤 했다. 아직 끝나지 않은 겨울 끝의 스산한 추위가 슬슬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이쯤 되면 본격적으로 시작되지 않는 봄에 대해 불만 섞인 적극적인 기다림의 행보랄까? 긴 겨울 동안 이어져 온 비바람 날씨에 움츠려지고 지쳐버린 마음은 조금이라도 봄을 느낄 수 있는 신호만 보이면 봄이라고 노래하고 싶은 마음으로 안달이 난다. 다시 또 추워지고 바람 불고 비도 올 텐데 잠시라도 찬란한 봄기운을 느끼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마음이 휙 돌아서서 봄을 찬양하고 노래하고 있는 것이 이젠 애틋한 매너리즘으로 자리 잡았다.
그 날도 그러하였다. 내 눈에는 봄색깔로 필터링되어서 하늘도 봄색깔, 확 트인 목장도 봄 색깔, 때마침 물가 위에서 우아하게 떠 있는 백조도 봄을 배경으로 한 훌륭한 장치로 보였으니까.
반 시간 동안 여유롭게 산책하던 중 하늘은 황혼빛으로 물들어갔고 이내 집으로 발걸음을 옮기던 중에 딸아이는 백조에게 말을 걸기도 하고 지푸라기를 던져주기도 했다. 나름 백조와 대화를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유유히 물 위에 떠있는 백조가 심심해 보였나 보다. 그때 저 멀리서 아빠가 막내딸을 자전거 뒤에 태우고 우리가 있는 곳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물가 위에서 얌전하게 노닐던 백조는 뭔가 심상치 않다고 느낀 것 같다. 우린 백조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었고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았는데 백조의 마음은 사람의 마음과 달랐나 보다.
어차피 사람과 동물의 인식 차이는 다른 것이겠지만 백조도 놀라고 나도 놀라는 일이 동시에 일어났다. 혼자 있던 백조는 네 명의 사람들에게 순간 위협감을 느꼈는지 지금까지의 모습과는 판이하게 다른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마치 화들짝 놀란 독수리처럼 비상한 움직임으로 물가 위를 잽싸게 달려가듯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다녔다. 혹시 백조가 우리에게 겁을 주려고 한 것일까? 처음엔 백조가 저렇게 화끈하게 힘차게 비상하던 동물이었나 싶어서 참 멋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거세게 날갯짓을 하며 수면 위에 파문을 일으키며 운하의 양쪽을 두세 번 왔다 갔다 하니 딸들은 약간의 겁먹은 듯한 모습이었다. 백조의 대응이 효과를 본 것이다. 자기를 위협하는 줄 알았던 백조의 본능적인 반사이자 거센 움직임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순간 움찔하게 만들었으니까.
눈 앞에서 순식간에 이루어진 이 장면의 인상을 담고 싶어서 서둘러 사진을 찍었었다. 그리고 이 사진들을 지인들에게 보여주니 백조의 힘찬 발버둥이 아닌가 하며 모두들 신기해하고 놀라워했다. 사진에 제목을 단다면 '우아한 백조의 희망적인 비상' 이런 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내 배경 설명을 듣고 나면 저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반전이라며 한 마디씩 내뱉었다.
사람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경향이 있다. 아니면 자기가 보는 것만 보고 그것이 전부일 것이라 생각한다.
또 보는 대로 믿는다. 그렇게 선입견과 고정관념은 자연스럽게 만들어져 간다. 그 세계에서 빠져나오려는 노력이 필사적인 대응이 아니면 선입견과 고정관념은 더 공교해질지도 모른다. 사상은 관습을 만들어내고 관습은 문화를 만들어내며 문화가 힘을 가지게 되면 거대한 장치로 변해가기도 한다. 그것을 깨뜨리려고 노력하는 이들이 그래도 알지 못하는 곳에 숨어 있다.
암스테르담에 있는 국립미술관 (암스테르담 라익스 뮤지움 ; Amsterdam Rijksmuseum)에 가면 수많은 걸작 중에 사람들의 시선을 단 번에 사로잡는 그림이 하나 있다. 처음 그 그림을 보는 순간 충격에 가까운 감동을 받았었던 명화다. 램브란트와 동시대에 활동했던 얀 아셀레인(Jan Asselijn)은 사람들 머리 속의 백조의 이미지를 뒤바꾸어 놓은 그림 한 점을 그렸다. 차이코프스키의 발레 '백조의 호수' 속에 등장하는 선이 곱고 아리따운 백조를 우아하게 그린 것도 아니다. 안데르센의 동화 ' 백조왕자'에 나오는 여동생을 향한 슬프고도 아름다운 사랑의 마음을 간직한 열두 마리 백조를 그린 것도 아니다.
보는 순간 '헉'소리가 나올 만큼 강렬한 몸짓을 한 백조 그림이다. 그러나 그림에 가까이 갈수록 백조는 뭔가 화들짝 놀란 표정을 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림의 제목도 위협받은 백조(The threatend swan)이다. 더 가까이 가서 바라보면 백조 오른쪽에 둥지가 있고 그 안에 알이 있다. 왼쪽에 검게 표현된 것은 물 위로 가까이 오는 검은 개다. 둥지 속의 알을 향해 다가오는 검은 개의 위협으로부터 맞서서 대응하는 백조의 힘찬 몸부림을 그린 것이다.
단지 다큐멘터리 동물의 세계에 나오는 우리가 모르는 동물들 이야기를 단순하게 그린 것이었을까?
얀 아셀레인(Jan Asselijn)은 작품 속에 알레고리(allegory)를 숨겨놓은 기지를 발휘했기에 네덜란드인들은 그 그림을 소중하게 여겨 이렇게 국립미술관에 소장하고 전시하고 있다. 당시 네덜란드는 스페인과의 오랜 세월 동안 지속된 전쟁을 끝내면서 신생 독립국가로 출발한다. 작은 나라인 네덜란드는 해양강국으로 발돋움하고자 해외로의 힘찬 비상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네덜란드의 움직임을 주변국에서는 달갑게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특히 막강한 해양국가였던 영국은 이러한 네덜란드를 눈여겨보고 있었다. 얀 아셀레인(Jan Asselijn)은 영국을 검은 개로 , 네덜란드는 둥지 속의 알로 표현한다. 알에 Holland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음이 흥미롭다. 분명하고도 강력하게 저항하며 다가 올 어려움에 대처한 백조는 영국으로부터 네덜란드를 지켜낸 당시 홀랜드 주의 지도자이자 총리인 요한 더 비트(Johan de Wit)를 상징하는 것이다.
프라하의 봄이 아닌 '홀랜드의 봄'은 그렇게 서서히 시작되어 17세기에 이르러 황금기를 누리게 된다.
위험과 위협 속에서 도리어 자신만의 무기로 맞선 백조 때문에 멍한 모습으로 바라보기만 하는 검은 개의 모습을 잘 그려낸 저 그림은 아직도 네덜란드인의 마음속에 하나의 판타지로 작용하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알고 있는 백조는 결코 우아한 백조가 아니다. 산책길에 만났던 백조도 그렇고 미술관에서 만난 백조도 그렇다. 자신에게 조금의 위협이라도 다가오면 상대방이 거세게 대응한다고 느끼게 하는 강한 백조였다. 그래서 오히려 그 백조를 바라보는 동안 당황하게 되고 혹시 저 크나큰 덩치를 가진 백조가 날 공격하면 어쩌지? 하는 생각으로 살짝 겁먹고 바라보았던 지난날 산책길에서의 백조와의 만남.
일상은 늘 고되다. 지긋지긋할 만큼 권태롭고 힘겹기도 하다. 버거워서 버거운 것이 아니라 숨통을 조여 오는 현실의 압박감 때문에 괴롭다. 언제 그 힘겨운 반복이 끝날까 싶어 내 인생의 봄은 언제 오나 싶을 만큼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다. 그런 기대감으로 하루하루 살아보지만 내일 또다시 만나는 것은 오늘만큼의 무거운 삶의 무게로 다가오는 덩치가 큰 일상이다.
현실은 견디라고 있는 것이다. 견뎌내어야 희망이 다가오고 맞서야 끝이 온다. 장밋빛 환상으로 봄을 기다린다한들 현실의 냉엄함은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 현실은 직시해야 현실을 맞서 통과할 수 있는 최소한의 힘을 가질 수 있다. 저항하듯 현실에 맞서야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
전쟁 같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우리네 인생. 긴 겨울을 접고 봄을 맞고 싶은 우리의 여린 인생은 저 백조처럼 위협받았을 때 처절한 몸부림으로 자신의 놀람을 표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강자가 위협할 때 궁지에 몰린 약자의 본능적인 대응과 그 놀람을 진정으로 표현하는 용기. 그 가열찬 몸부림 때문에 되려 강자 스스로 위협감을 느끼는 반전. 혹시 아는가? 현실에 전투적으로 반격하고 저항하다 보면 일상이라는 혹독한 저주가 겁먹고 눈치 보는 검은 개처럼 가만히 꼬리 내리고 사라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