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가득한 강아지똥과 민들레를 바라보며 따뜻한 세상을 품어본다
2016년 5월 17일
대한민국에 기쁜 소식이 들렸습니다. 소설가 한 강의 맨부커상 수상에 하루 종일 기분이 들떠 있었습니다. 이 곳에서 비교적 가까운 나라인 영국의 런던에 있는 빅토리아 앤 알버트 뮤지움에서 진행된 수상식. 지리적으로 가까운 곳에서 즐거운 소식이 흘러나온 것에 괜스레 심리적으로 더 가깝게 느껴지던 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마냥 천진스러운 미소만 지을 수 없던 것은 그 소설이 그려내는 세상의 어두움과 아픔 때문이었습니다. 아직 책을 접해보지 못했으나 각종 미디어를 통해 대강의 윤곽만으로도 그 흥겨운 기분을 눈치챌 수는 있었습니다. 저도 한 번 그 책을 접하고 싶었으나 이 나라 서점의 영문서적 코너에서 영문판 책을 찾아보는 것이 훨씬 더 빠른 방법인 것 같습니다.
2007년 5월 17일
아동문학가인 권정생 할아버지께서 타계하신 날입니다. 우리 집 아이들도 읽은 '강아지똥'과 '몽실언니' 이외 수많은 동화책을 쓰신 분. 어린 시절부터 가난과 가족 간의 헤어짐의 고통을 겪으신 분. 국민학교를 겨우 졸업한 이후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험한 일과 궂은일을 감당하며 사신 분. 폐결핵에 걸렸으나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해 평생 오줌통을 몸에 차고 다니셨다는 분.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 안동의 어느 교회에서 지은 토담집에서 지내신 분. 죽을 때까지 검소하게 사신 분. 인세로 벌어들인 어마어마한 돈은 자신을 위해 쓰지 않고 어린이와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을 위해 써달라고 하신 분, 넉넉하게 사실 수 있음에도 빌뱅이 언덕에 지은 겨우 오두막 같은 집 한 채에서 동화를 계속 써오신 분. 이오덕 작가님과 30년의 우정을 쌓아오신 분.
셋째 딸이 세 살 넘었을 때 자기 전에 읽어주던 책 중에 유독 기억에 남는 책이 있다.
내가 어릴 때 동화책을 읽었을 때 보다 아이에게 동화책을 읽어줄 때 더 마음이 울컥해진다.
좀 더 과장해서 표현하면 마치 내가 동화작가가 된 기분이다.
그래. 이 마음으로 이렇게 아름답고 슬픈 동화를 썼을 거야.
슬픈 이야기 속에 얼마나 따뜻한 메시지가 담겨있는지...
담담하게 책을 읽어주다가 결국 마지막에는 떨리는 목소리로 읽게 되는 책.
아픔과 고통에 가까울수록 기쁨과 희망이 보이는 글들.
어쩌면 이러한 역설적인 인생의 비밀을 아이들에게 동화책을 통해 전해주는 것은 아닌가 싶다.
언젠가 어른이 되어서 너희들도 이렇게 알아가겠지.
권정생 할아버지의 동화가 그리 밝고 환하고 흥겨운 이야기는 아니지만, 면면히 흐르는 감싸안음과 연약한 것들에 대한 애정은 책을 덮는 순간까지 삼가는 마음을 가지게 한다.
슬픈 이야기로 가득 찬 동화이지만 결코 절망적이지 않은 따스한 이야기들이다.
소설가 한강은 한국문학을 읽고 자라 왔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멋진 고백이었다.
한국 문학에서만 그려낼 수 있는 마음 깊숙한 곳에서 울려 퍼지는 소용돌이 같은 이야기를 그녀도 읽었다는 이야기다.
돌이네 흰둥이가 똥을 눴어요.
골목길 담 밑 구석 쪽이에요.
흰둥이는 조그만 강아지니까 강아지똥이에요.
이렇게 시작되는 강아지똥 이야기.
무시무시하고 딱 봐도 족보 있는 그러한 개가 아니라 여느 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동네 작은 강아지.
무심초 지나치다 마주할 수 있는 광경. 골목길 담 밑 구석에 놓인 강아지똥.
작가는 그런 평범하고 작은 강아지부터 시선을 준다.
그 작은 강아지가 생산해내는 똥.
강아지똥이 만나는 대상도 주변에서 흔히 마주치는 강아지 이웃들이다.
참새, 흙덩이, 어미 닭과 병아리, 그리고 민들레.
그들이 강아지똥과 스치면서 무심코 내뱉은 말들은 여린 가슴을 가진 강아지똥에게는 마음 한 구석을 후벼 파는 표현들이다.
'똥 똥 에고 더러워"
'넌 똥 중에서도 가장 더러운 개똥이야'
'암만 봐도 먹을 만한 건 아무것도 없어, 모두 찌꺼기뿐이야'
하지만 강아지똥은 그들을 원망하거나 질투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
그저 자신의 본모습처럼 보이는 실체에 대해 흐느낀다.
'정말 내가 너보다 더 흉측하고 더러울지 몰라'
'난 더러운 똥인데, 어떻게 착하게 살 수 있을까?
아무짝에도 쓸 수 없을 텐데.....'
그 와중에 강아지똥은 흙덩이와 대화를 나누는 중 흙덩이를 대하는 소달구지 주인을 보며 감동한다.
민들레를 발견한 후 질문을 한다.
'너는 뭐니?'
'난 예쁜 꽃을 피우는 민들레야'
"얼마만큼 예쁘니? 하늘의 별만큼 고우니?'
.....
.....
그런데 한 가지 꼭 필요한 게 있어
...
네가 거름이 돼 줘야 한단다
네 몸뚱이를 고스란히 녹여 내 몸속으로 들어와야 해
그래야만 별처럼 고운 꽃이 핀단다.
강아지똥은 얼마나 기뻤던지 민들레 싹을 힘껏 껴안아 버렸어요.
.
.
.
봄이 한창인 어느 날,
민들레 싹은 한 송이 아름다운 꽃을 피웠어요.
향긋한 꽃 냄새가 바람을 타고 퍼져 나갔어요.
방긋방긋 웃는 꽃송이엔 귀여운 강아지똥의 눈물겨운 사랑이 가득 어려 있었어요
강아지똥은 보잘 것 없고 하찮은 존재이다.
밟히고 치워져 버려도 누구 하나 안타까워할 이 없는 그런 미물이다..
그들에게 말을 거는 대상들도 평범한 존재이나 그 평범함 축에 끼지 못하는 강아지똥에게는 그들 역시 부러움의 대상이다. 비록 자기에게 마음의 생채기를 그어대는 말을 하지만 강아지똥은 아픈 감정을 외부로 투사하지 않고 자신을 더욱 보듬어 안고 하늘을 향한 마음가짐으로 뻗어간다.
민들레와의 대화에서 강아지똥의 가치관은 더욱 드러난다
권정생 할아버지의 맑고 깨끗한 신앙과 삶이 그대로 묻어나는 문장들이다.
내가 교회에 나가고 예수를 믿는 것은
예수가 사랑했던 들꽃 한 송이를 나도 사랑하고 싶고
그가 아끼던 새 한 마리를 나도 아끼며 살고 싶기 때문이다.
구태여 큰 소리로 외치며 전하는 복음이 아니라
바로 지금 내 곁에 함께 있는 가련한 목숨끼리 다독이며 살아가고 싶을 뿐이다.
슬플 때 함께 슬픈 노래 부르고 기쁠 때 함께 기쁜 노래 부르면,
그것이 찬송이 되고 기도가 되고 예배가 되는 것이다.
-빌뱅이 언덕 中 -
강아지똥의 훈훈한 이야기는 결코 권정생 작가의 삶과 무관하지 않다. 아무짝에도 쓸모없이 보였던 그의 인생이 그대로 녹아든 이야기였다. 그래서 더 가슴을 아린다.
사람들은 잘나고 능력이 있으며 가진 것이 많은 자들에게 부러움과 존경의 눈길을 쉽사리 준다. 본인 자신이 그러한 사람이든 아니든. 하지만 이러한 능력자들은 대체적으로 따뜻한 시선으로 보잘 것 없는 것들을 바라보지 않는다. 진짜 훌륭한 사람을 제외하고.
그런데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잘난 사람들 눈에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쓸모없고 보잘 것 없는 인생이라 치부하고 그리 대우를 한다. 이것이 서글프고 처연한 현실일 수도 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생각과 감정이 무시되고
무시된 감정에 대한 아픔을 호소해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감정 소통이 어려운 시대에 하루하루 힘들게 살아간다.
내가 아는 사람들과 모르는 사람들과 모두 관계하면서.
강아지똥처럼 그 아픔을 내면화시키고 밖을 향하여 긍정적인 발돋움을 하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대부분 분노와 상처와 아픔이 곪아진 딱딱한 심장으로 버티며 살아간다.
어떻게 권정생 작가는 그러한 마음의 여유와 따뜻함을 가질 수 있었을까?
세상으로부터 가족으로부터 따뜻함을 그다지 많이 경험하지 못했는데.
그가 가진 진실한 신앙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아픔과 고통을 잘 극복하고 승화시킨 진짜 훌륭한 사람이었나 보다.
그 두 가지가 절묘하게 이루어진 작품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사람이 그립다.
권정생 작가가 살아온 시대와 똑같은 고난은 없지만, 지금은 더 내면화되고 개인적으로 돌려지는 고난이 얼마나 많은 세상인가?
1980년 5월 18일
광주에서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다.
2016년 5월 18일
맨부커 수상작인 '채식주의자'와 함께 책 '소년이 온다' 열풍이 함께 일어났다.
매일 스치듯 만나는 사람들.
그러나 그들과 무슨 대화를 나누었던가
그리고 그 대화를 나누며 얼마나 그 마음이 공감이 되고 도전이 되고 마음과 인생을 바꿀만한 말들을 나누었던가?
강아지똥은 결코 보잘것없는 존재가 아니었다.
스치는 관계에서 적절한 질문을 던질 줄 아는 영리한 존재였다.
자신의 아픔에서 비롯된 승화된 꿈을 용기 있게 말할 수 있는 존재였다.
정말 슬픈 건
지금은 이러한 꿈을 쉽사리 말할 수 없는 세상이다.
적어도 강아지똥이 판치던 시대에는 그런 꿈을 이야기할 수 있는 시절이었나 보다.
약하고 힘없는 강아지똥도 꿈을 꿀 수 있고 그 꿈이 이루어지는 시절 말이다.
꿈을 터놓고 이야기하고 그 꿈을 들어줄 마음의 여유를 가진 사람이 별로 없어 보이는 시대에 살고 있다.
아니 개인의 아픔이든 시대의 아픔이든 아프다고 말도 못 하고 여기서 비롯되는 꿈조차 이야기 꺼내기 어려운 시대이다. 침묵과 방관과 자조와 냉담함이 가로막는 시대이다.
문득 권정생 할아버지가 그립다.
길가에 널린 강아지똥을 볼 때, 요즘처럼 민들레가 여기저기서 피어날 때.
지독하게 아프고 슬프지만 절망적이지 않을 수 있는 시대가 도래했으면 좋겠다.
가장 연약한 것에서 비롯되는 가장 강렬하고 아름다운 꿈을 서로가 이야기하는 시절이 다가오면 좋겠다.
아동문학도 온 생애를 바쳐 쓸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한 편의 동화를 빚어내기 위해 다른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 뜨거운 작가가 나와야 만이, 아동문학이 구원을 받고 또 인간이 구원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권정생 할아버지가 지금 우리들 귓가에 대고 이리 소곤대시는 것 같다.
소설가 한강씨의 기쁜 소식이 하나의 물꼬였으면 한다.
소설 속에서 묘사된 참담한 세상과 아직도 아물지 않은 광주의 상처와 상흔이 남아있더라도
그렇게 이야기하고 숨겨진 분명한 꿈을 노래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위로가 되고 다 같이 부를 수 있는 노래였으면 좋겠다.
하느님께 기도해 주세요
제발 이 세상, 너무도 아름다운 세상에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일은 없게 해 달라고요.
제 예금통장 다 정리되면 나머지는 북측 굶주리는 아이들에게 보내주세요.
제발 그만 싸우고, 그만 미워하고 따뜻하게 통일이 되어 함께 살도록 해주십시오. 중동, 아프리카, 티벳 어린아이들은 앞으로 어떻게 하지요?
기도 많이 해주세요.
- 권정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