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요와 책 한권을 챙겨 가까운 해수욕장으로 갑니다
Ep.7
3월이 되면 따뜻한 남쪽 나라 제주에 사는 꽃들은 한창 꽃잎을 틔우느라 바빠진다. 불어오는 미지근한 바람과 내리쬐는 태양이 더 이상은 그들에게 게으름을 허락하지 않는 것 같다. 제주에 사는 모든 생명체들은 서로서로 자신의 온기를 나누며 제주의 온도를 더욱더 포근하게 만든다는 특징이 있다.
덕분에 나는 따뜻한 공기를 휘저어 걸으며 여기저기 피어난 꽃들을 보는 재미에 소소한 행복을 느끼며 하루를 보내고 있다. 특히 이 즈음에는 그 누구보다 내가 맨 먼저 꽃이 만개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 같아 특별한 기분까지 든다. 마음 한편에는, 아직은 여린 이파리들이 맨 몸으로 잎을 펼치기에는 날이 차갑지 않은가 하는 걱정이 들기도 하지만 꽃들은 어제도 오늘도 너무나 예쁘기만 하다.
어제는 하도 날이 좋아서 하루의 틈을 잠깐 내어 중문에 있는 색달 해수욕장으로 향했다. 이제 막 겨울이 끝나고 봄이 오는 지금 같은 때에 해수욕장을 찾는 사람은 많지 않다. 두터운 겉옷을 입은 사람들이 여기저기 보이긴 하지만 사진을 몇 컷 찍는 시간 동안만 머무르는 게 태반이다.
백팩에 챙겨 온 담요를 꺼내 모래사장에 펼친다. 그리고 펼쳐진 담요 위에 가방을 툭 던지고 책을 올려둔다. 신발을 벗고 담요 위에 자리를 잡는다. 책의 누런 페이지는 강한 제주의 빛을 받아 감히 똑바로 쳐다볼 수 없을 만큼 새하얘진다. 나는 닫아두었던 백팩의 자크를 열어 선글라스를 꺼내 얼굴에 얹는다. 이제야 겨우 책을 읽을 만 해졌다.
모래사장에 담요를 깔고 빛을 쬐며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을 읽는 일. 여기에 서라운드로 펼쳐지는 파도 소리와 나를 휘감는 봄바람까지 더해지면 어느새 나는 '오늘 자 천국'에 다다랐음을 느낀다. 모래 알갱이의 수 만큼 사람이 붐비는 여름에는 결코 찾아오지 않는 이 천국에 나는 지금 막 무사히 도착했다.
책을 읽다 보면 그 속에서 나의 모습을 만나는 일이 종종 있다. 나의 경우 캐롤라인 냅의 '명랑한 은둔자'를 읽으며 나의 고독을,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를 읽으며 방황하는 내면을, 엘리자베스 길버트의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를 읽으며 방랑의 삶을 갈구하는 나를 마주치곤 했다.
책장 맨 귀퉁이에 꽂혀있던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를 주저 없이 골라 가방에 챙겼다. '그래, 오늘은 이 책이다!' 이 책은 이미 영화로도 널리 알려진 작품이지만 그 진면목은 바로 책에 있다. 주인공이 이혼을 결심하고 해내고 끝마치고 그 후에는 자신을 찾는 여행이 꼼꼼하게 기록된 이 작품은 단연 나의 '최애' 책이다. 기록할 만한 문장들도 차고 넘친다.
책에서 눈을 떼 잠시 정면을 응시한다. 갈매기 두 마리가 정확한 '3'자를 그리며 하늘을 항해한다. 갈매기들은 계절에 상관없이 그리고 시간에 구애 받지 않은 채 자기들만의 영공을 자유롭게 누빈다. 그들의 날갯짓 뒤로 보이는 구름은 작게 뭉쳐진 채로 아무렇게나 흐트러진 모습이다.
지금 내가 누워있는 이 낙원 속에는 이렇듯 자유가 있고 나와 함께 호흡하는 생명체가 있으며 또한 부서지는 물이 있고 봄을 실어 나르는 바람이 있고 바스락 거리는 모래 알갱이가 존재하고 있다. 시선을 더욱더 멀리 던지자, 저 멀리 산책 나온 돌고래 가족의 모습이 보인다. '그렇지, 이런 날씨는 돌고래도 숨쉬기 기분 좋은 날이지' 하고 생각하며 한 마리 두 마리 세어본다. 돌고래의 꼬리 짓에 반짝거리는 바다가 부서진다. 그리고 그 모습을 신기한 듯 바라보는, 내 눈에도 보일 만큼 커진 사랑을 가뿐히 짊어지고 가는 남녀의 모습이 그림 같이 펼쳐져 있다.
이 정도 힐링이면 앞으로 일주일도 거뜬할 듯 싶다. 사실 일주일이건 하루이건 아무 상관이 없다. 제주에 살면 원하는 때에 원하는 방식으로 나를 치유해줄 수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