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8
오늘 제주의 낮은 유난히도 더웠는데 확인해보니 최고 온도가 21도까지 올라갔다. 한낮의 태양이 온 세상을 워낙 데워 놓은 터라 달이 뜬 지금도 대기는 미지근하니 기분 좋은 온도를 유지하고 있다. 나는 가벼운 점퍼만 걸치고 개 두 마리와 함께 집 근처 공원으로 산책을 나왔다.
최소한의 가로등이 길을 밝히고 있는 이 공원에는 지금 우리 말고 아무도 없다. 덕분에 소리라고 하는 형태로 나를 찾는 것은 저 멀리 도로의 소음 그 이외에는 없다. 멀리서 불어오는 바람에는 바다의 짠 냄새가 약간 서려있고, 팜파스 나무들의 이파리는 소소한 미풍에도 여기저기 흔들거리며 자기들끼리 수다를 떨고 있다. 개들은 땅의 냄새를 맡으며 영역표시를 하고 있는데, 유난히 한 지점에서 떠날 줄을 모른다.
나는 지평선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바다 위에 별들이 떠다니고 있다. 고기잡이 배들이다. 달이 지면 하루가 시작되는 그들의 평범한 일상이 내 눈에는 별이 되어 비치고 있다. 나는 진짜 별을 보려 고개를 젖혀 하늘을 바라본다. 남색 밤하늘에 대비되는 하얀 별들. 오늘은 특히나 그 빛과 모양이 선명하다. 별들이 나를 부르고 있음이 분명하다.
제주에 살면서 생긴 습관이 있다면 바로 내 머리 위에 별들이 잘 지내고 있는지, 여전히 나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있지는 않은지 확인하는 일이다. 이 별들은 내가 태어난 시간부터 항상 내 머리 위에 있었고, 나에게 시선을 떼지 않았을 테지만 서울에 살 때는 그들의 모습을 잘 볼 수가 없었으므로 그들이 그렇게 나를 바라보고 있는지 조차 알지 못했다. 그런데 제주로 온 지 2주가 되던 어느 날 무심코 올려다본 하늘에 별들이 모여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나는 그때부터 이 별들을 나의 제주살이 동반자로 여기게 되었다. 그렇게 나의 첫 번째 제주 친구가 되어준 이 별들은 나에게 믿을 수 없을 만큼 깊은 위안과 위로가 되어 주고 있다.
아는 사람 한 명 없이 제주 생활을 시작했지만, 나는 이미 정말 많은 친구를 사귀었다. 이유 없는 우울감에 속상해하던 어느 날 나선 산책길에서는 길 변두리에 서있던 갈대가 바람이 부는 찰나를 기회 삼아 내 팔 언저리를 간지럽혀 나에게 웃음을 주었고, 문득 눈물 나게 엄마가 보고 싶던 날에 찾은 공원에서는 울 엄마가 제일 좋아하는 코스모스가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그 공원에서 엄마를 만날 수 있었다. 나를 아가처럼 보살펴주는 이 친구들이 없이는 절대로 행복해질 수 없다.
이렇듯 자연에 사는 나의 벗들은 나를 현실적인 문제들과 고질적인 우울감 그리고 결코 벗어날 수 없는 돈과 시간의 속박으로부터 잠시나마 물리적으로 벗어나게 만들어주었다. 나의 경우 살면서 겪는 여러 가지 문제로부터 몸을 먼저 떨어뜨려 놓으면 이내 마음도 멀어지게 된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게 되었다. 내가 자연 속에 잠시 숨어들어 있는 동안에는 그 어떤 고난도 나를 찾을 수 없었고, 그럴 때마다 난 인간이 곧 자연임을 매번 깨달았다.
드넓은 자연의 가슴 언저리에 머무르는 일, 그것은 그 품 속에 파묻혀 잠시나마 '나'를 포기하고 순수한 휴식을 취하는 일이다. 발그레 해진 내 뺨을 어루만지는 엄마의 손길이 느껴져 더욱 나른해지는 느낌을 받을 때면 나는 다시금 살아갈 용기를 내게 되고 씩씩하게 일어설 수 있게 된다. 이때에 난 굳어버린 나의 척추가 조금은 유연해지고 부드러워졌음을 느낀다. 하물며 마음은 얼마나 뽀얗게 빛이 나고 있을까.
뛰노는 개들을 보며 이런저런 공상을 하고 있으니 저 멀리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얼른 개들의 목줄을 채우고 겸사겸사 자리를 뜰 준비를 한다. 대략 삼십 분 동안 이 넓은 공원을 우리가 독차지했으니 이만 비워주는 것이 매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