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저주들은 대체로 어떻게 언어화되었나? 죽었으면 좋겠다를 넘어, 가장 고통스러운 질병을 앓다 죽을 것이다. 망했으면 좋겠다를 넘어, 망해서 온 동네방네 소문이 다 날 것이다. 헤어졌으면 좋겠다를 넘어, 매일매일 처절하게 싸우다가 헤어지게 될 것이다.
이 저주들은 모두 실패했을 것이다. A가 죽었다는 말도, B가 망했다는 말도, C와 D가 헤어졌다는 말도 나는 들은 바 없다. 그건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며, 설령 일어났다 하더라도 내 귀에는 들리지 않을 정도로 멀어진 이들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나의 저주는 너무 큼직한 크기라, 천지신명이 들어주기 힘들 만한 규모였으며, 내 귀에 들려오길 바랄 만한 규모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저주가 통하여서든 혹은 운명이었든 실제로 그 일이 일어나여, 내 귀에 들린다 해도, 기쁘기보다는 고통스러울 만한 크기.
이 정도 크기의 저주였다면 어땠을까. 사랑을 나누는 밤이 오히려 불행한 밤이길 바라는 저주. 김사월은 책에서 이렇게 말을 했고, 노래에서는 “너의 침대에 저주를 보내서 세상 가장 불행한 사랑을 나누게 될 거야.”라고 주문을 건다.
이루어질 수도 있을 법한 크기의 저주, 천지신명이 옛다 하고 들어줄 만한 크기의 저주, 그리고 중요한 건 내 귀에 들리지 않을 만한 크기의 저주, 그래서 나는 혼자 가끔 상상만 해도 웃음이 나올 만한 크기의 저주, 혹시나 내 귀에 들린다 하더라도 기분 나쁘지 않을 만한 크기의 저주
오늘부터 나의 저주의 화법은 많이 바뀔 것이다. 소소하되 반복적이고 반복적이라 더욱 고통스럽되 그 고통을 딱히 해소할 수 없을 만한 형식의 저주들. 죽기를 바라기보다, 아프게 뗀 충치 보철이 자주 떨어져 버리길 바라기. 망하길 바라기보다 고가 가전제품마다 뽑기운이 없길 바라기.
고통스럽게 헤어지기보다는 평생 그렇게 처절하게 싸우면서 계속 살길 바라기, 이제 매력이 빵점이 되어서 헤어져도 다른 이도 못 만나길 바라기(흠, 이건 좀 큰 규모인가?) 이런 내용들이라면 저주를 거는 나도 고통스러운 행위라기보다는 웃음이 나는 즐거운 행위가 되겠지.
나에게 이런 내용의 저주들을 거는 이들도 많을 것이다. 그들 귀에 가 닿을지 모르겠지만, 여러분들의 저주는 매우 잘 걸려 있다. 나는 죽지 않을 만큼 몸이 어긋난 데가 많으며, 나는 망했다고 보기는 힘들 만큼, 삶의 요소요소가 고장나 있다. 저 세상으로 환불하기에는 아직 아까운 정도로.
김사월님의 산문집, "사랑하는 미움들"이 나왔고, 오늘 벨로주에서 북콘서트가 있었다. 잘 다녀왔고 함께 사진도 찍었다. 사인을 받기 전에는 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 잠시의 뇌정지도 있었다. 집에 들어오는 길에는 김밥을 사왔다. 적당한 규모의, 야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