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연인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
연애 초기 어느 날이었다. 아마 만난 지 100일도 안되었던 것 같다. 그날따라 카페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싸이월드 미니홈피 쓰던 시절을 이야기하게 되었다. 자연스레 각자의 싸이월드에 로그인하게 되었는데, J의 싸이월드에 커플 다이어리가 남아있는 것을 발견했다. 몇 년만의 로그인이었다. 그 긴 시간동안 커플다이어리의 존재가 까맣게 잊혀진 채 남아있었던 것이었다.
어, 이게 왜 있지. 너무나 당황해하며 황급히 다이어리를 삭제하려는 J를 저지했다. 살짝 스크롤을 내리니 ‘사랑해’ 라고 적힌 글이 보였다. 아뿔싸! 오늘 J는 내게 ‘과거에 너만큼 사랑한 여자는 없었어. 이전에는 사랑한다고 말한적도 없어’ 라는 멘트를 날린 날이었다. 그 말을 한 지 한 두 시간만에 모순된 증거를 발견한 것이었다.
너무도 당황해하는 J를 보며 낄낄 웃었다. 커플 다이어리는 J가 재수 생활 시절 만난 여자친구와 쓰던 것이었다. (무려 10년도 더 된 것이다) 커플 기능이 해지된 후 J의 글만 남아 있었던 것 같다. 자세히 다 읽어보진 않았지만, 대학 입시를 준비하던 때라 진로와 관련해 고민하거나 조언해주는 글들이 주를 이루었다. J는 커플 다이어리를 삭제하겠다 했고, 나는 그런 그에게 ‘절대’ 삭제하지 말라고 했다.
우리 부부는 종종 썸을 포함하여, 옛 연인의 이야기를 나누곤 한다. 구구절절 어떤 데이트를 했는지 이야기하기보단(어차피 기억나지도 않는다) 그 친구의 인성이 어땠는지, 그 때의 나는 어떤 모습이었는지 이야기하며 그 친구는 왜 그랬을까? 그 때의 나는 철없었구나. 하는 그런 이야기들을 서로 늘어놓았다. 각자 상대 연인의 입장에서 서서 그 여자는/그 남자는 이런 생각이었을거야, 하며 같은 성별로서 의견을 대변하고 이해시켜주었다. 이런 대화가 가능한 건 서로에 대한 믿음 때문이기도 하지만, 과거 그 연인을 만났기 때문에 지금의 우리가 만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J는 나를 만나기 전에 썸만 몇 개월씩 타다가 흐지부지된 적이 많았다. 그래서 다음에 마음에 드는 이성이 있으면 긴 시간 끌지 않으리라 다짐했다고 한다. 나는 J를 만나기 전 꾸준히 연인이 있었는데, 타인에 대한 경험이 부족했기에 여러 사람을 만나며 결혼할 사람은 이런 사람이면 좋겠다, 하는 기준들을 몇 가지 세울 수 있게 되었다. J는 그런 기준들을 모두 충족했고, 내게 첫눈에 반한 J는 두 번째 만남에서 바로 사귀자고 말했다. 그렇게 시작된 우리는 작년, 부부가 되었다.
한 번은 J에게 과거 연인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기분 나쁘지 않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과거의 다른 사람과 연애하던 모습도 너의 일부분인데 그걸 어떻게 없던 걸로 하냐. 그 때의 당신이 있었기에 지금의 당신이 있는건데. J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과거는 삭제한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사람에 대한 기억의 파편을 가지고 현재와 미래의 인연을 만든다. 과거의 커플다이어리는 10년 전 J의 철없던 모습의 증빙이자, 나를 선택한 이유의 기록이기도 하다. 과거의 파편들 덕분에 시간이 흘러 우리는 우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