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새댁의 투블럭컷
신혼여행에서 막 귀국한 평일 어느 날이었다. 시댁과 친정집에 인사를 드리기로 한 주말을 앞두고, 결혼식 전 머리를 다듬고 뿌리염색을 했던 미용실에 다시 찾아갔다.
"이 머리 해주세요"
미용실 원장님께 내민 사진에는 숏컷머리를 한 모델이 있었다. 자르기 전까지 원장님은 재차 머리를 자르겠냐고 물었다. 재작년 말, 단발병을 이기지 못하고 똑단발을 한 후 결혼식 전까지 부지런히 기른 머리였다. 그러나 그 또한 예행연습이었다. 한 달 뒤, 나는 숏컷에 적응되자 과감히 옆머리를 진동하는 이발기에 맡겼다. 소위 말하는 투블럭컷이었다.
선머슴 같은 모습에 주변의 반응은 여러 가지였다. 크게 세 가지 반응이었는데, 여자들은 보자마자 “멋져!”를 외쳤고, 남자들은 “왜 잘랐어?”라며 이유를 궁금해했다. 성별로 비슷한 반응이 나오는 것이 신기했다. ‘긴 생머리 여자’라는 미의 기준에 과감히 도전한 것에 대한 감탄사와 ‘여자가 왜 남자 머리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었으리라. 그 모든 반응의 중심에는 ‘긴 생머리 여자’라는 미의 기준이 있었다.
동생은 SNS에 올라온 내 사진을 보고 ‘안 예쁘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먼저 든 것에 스스로 흠칫 놀라 ‘예쁘다’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예쁘다는 기준은 대체 누구에게 예쁜 모습인 걸까? 우리는 얼마나 긴 시간 동안 누가 정했는지도 알 수 없는 기준에 매여 살아왔을까? 그리고 그 기준을 누가 세우는지는 세 가지 반응 중 마지막 반응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남편이 허락했어? 그렇게 머리 해도 괜찮대?
성별에 상관없이 들을 수 있는 말이었다. 이처럼 여성스럽지 않은 모습을 남편이라는 작자는 그냥 두고 봤단 말이야? 이렇게나 안 예쁜데? 그 질문의 중심에는 남이 보기에 '예쁘지 않은 나의 모습'이 있었고, 이제 한 남편에게 '소유된' 여성이라는 나의 모습이 있었다. 이 질문을 하는 누구도 머리를 자른 진정한 의미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았다. 왜 내가 머리를 자르고 싶어 했는지 가장 잘 이해한 유일무이한 사람은 다름 아닌 바로 남편인 J였다.
“나 어때?”
홀가분해진 머리를 하고 집에 들어가자, J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렇게 말했다.
“예뻐. 자기는 삭발해도 예뻐”
남편이 허락했냐는 물음에 나는 당당하게 '응!'하고 대답하곤 했다. 내 대답에 상대방은 꿀벙어리가 되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고, 이에 묘한 승리감을 느끼기도 했다. J는 처음 내가 짧게 머리를 자르겠다는 말에 '자기 머리는 자기 꺼니까!' 하고싶은 대로 하라고 했다. 딱히 '허락'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주변의 잔소리에는 J가 마치 '허락'했다는 듯이 본인을 팔라고도 했다.
남자가 허락한 기준이 이 세상 미의 기준라면, 남자가 허락해주면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점을 역이용한 것이었다. '남자의 허락'과 내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다는 '자유'가 공존한다는 점은 아이러니이긴 했지만 말이다.
세상의 기준으로 봤을 때 나는 예쁘게 생긴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딸이 남들에게 어떻게 보일지 신경 쓰이던 엄마는 내가 살찔까 걱정했고, 출근 전 식탁 앞에 앉아 그 날의 보여지는 모든 것을 점검했다. 오늘은 눈썹이 이상하니 다시 그리라던가, 블러셔가 너무 과하다던가, 옷이 어울리네/안 어울리네 등 한 마디를 얹었다. 기성세대로부터 다음 세대로 '세상이 만든 프레임'이 물려지는 순간이었다.
집을 떠나 서울에서 일을 하게 되면서 엄마의 그런 잔소리로부터 자유롭게 되었고, J는 그런 프레임에서 더욱 벗어나길 종용했다. 그래서 결혼식에서 웨딩드레스를 입고 가장 '여성스럽고 아름다운 나'로써 절정을 찍자, 신혼여행 직후 머리를 싹둑 잘라버렸다.
서걱서걱, 긴 머리를 단번에 과감히 잘라내는 가위소리는 그동안 들었던 가위소리와 달랐다. 가위소리가 지나간 자리에는 20cm 가까이 되는 지난 과거들이 뭉터기로 바닥에 깔렸다. 전기면도기가 한껏 옆머리를 지나가자, 나를 나로 세상에 드러내고자 하는, 굳은 의지가 가득 담긴 얼굴이 거울에 비쳤다. 아름다운 한 '여성'이 아닌, 누군가에게 종속된 '여성'이 아닌 그저 한 '사람'의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