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여자의 가슴을 자꾸 훔쳐봤다.
0.3초
남자의 시선이 빠르게 여자의 가슴을 훓는다. 여자의 시선은 0.2초 더 남자의 볼록 나온 배에 머무른다. 남자만큼 날렵하지 못한 스캐닝이다. 사실, 스캔이라기보다 한 달 사이 나온 남자의 배에 자연스레 눈이 갔을 뿐이다. 빨리 시선을 떼야하는데 남자도 충분히 눈치챘을 정도의 머무름이다. 너무 오래쳐다봤나? 조금 무안했으려나? 미안한 마음이 들다가도 당신도 내 가슴 훔쳐봤잖아- 하고 여자는 혼자 퉁치고 만다.
한 달 사이에 만난 남자는 몸무게는 늘어났을 망정 지난번과는 다르게 나름 신경쓰고 나온 양이다. 지난 번 집에서 자다깨 기어나왔던 모습은 사라지고, 버튼 다운에 코트 차림이다. 육개월 넘게 직장에서 볼 때도 티셔츠 쪼가리만 입던 남자의 차려입은 모습을 보자니 어색하기만 하다. 아홉 수를 넘어 서른을 찍더니 새출발이라도 하려나 여자는 고개를 갸우뚱 한다. 이탈리안 레스토랑에 데려올 때부터 별 일이다 싶었는데. 여자는 후드잠바에 털부츠를 끌고 나온게 조금 미안해진다. 사실, 그마저도 거짓말일지 모른다. 잠바속에 입은 딱 붙는 회색 베이직 셔츠 덕에 남자의 시선이 자꾸 한곳에 힐끗 거렸으니. 당신- 내 가슴 훔쳐봤잖아. 여자는 다시 후드잠바를 걸쳐야 하나 잠시 고민에 빠진다.
스파게티와 떠먹는 피자를 시킨다. 스파게티는 사실상 샐러드에 면을 섞은 것이고, 떠먹는 피자는 치즈와 고구마 범벅된 안주다. 맥주를 두 잔 시키지만, 안타깝게도 여자스러운 레몬맥주다. 처음 몇 모금은 신선한 맛에 들이키지만 이내 맥주도 음료도 아닌 맛에 맥주잔을 내려놓는다. 굉장히 여자여자한 곳이네요. 여자는 별 생각없이 말한다. 당신 여자 아니예요? 남자는 능글맞게 웃으며 대답한다. 에헤이- 여자는 괜스레 손을 내저으며 시덥지않은 척 넘겨버린다. 다시 별 맛 나지 않는 맥주잔에 입술을 가져다 댄다. 오늘 뭐 할 말이라도 있어요? 술 되게 잘 마시네. 남자가 넌지스레 띄어본다. 목소리에서 은근한 기대감이 묻어난다. 간만에 만난 남자가 반가우면서도 이런 착각은 곤란하다고 여자는 혼자 생각한다.
오랜만에 만난 사이지만 대화는 자연스레 이어진다. 빵빵 웃음이 터지고, 실없는 농담이 오고간다. 취하지 않아도 충분히 친숙하다. 왜 자신과 비슷한 성향의 사람들은 다 남자일까 여자는 안타까워한다. 남자가 적당히 맞춰주기 때문이라는 걸 여자는 잘 모르는 듯하다. 여자는 정말로 아직 많이 어렸다. 남녀 사이 미묘한 긴장관계는 잘 파악했지만 그걸 어떻게 완화시키는지 배운 적이 없었다. 자신의 격앙된 리액션이 남자를 부추긴다는 것은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 깨달은 일이었다. 일곱 살 연상의 남자는 이것이 요물인지 정말 순진해 빠진 건지 나름의 고민에 빠진다. 간간히 약한 섹드립도 던져보지만 여자는 못 알아듣는 건지 못 알아듣는 척 하는 건지 헤헤 웃고만 있다. 남자는 여자의 가슴을 다시 훔쳐본다. 그렇지, 요물은 요물이지- 하고 혼자 반추한다. 아직 열기가 남아있는 후라이팬 가장자리를 잡고 치즈를 길게 늘어뜨리며 피자를 떠먹는다.
여자는 자신과 비슷한 괴짜를 만남에 반가워하면서도 불안한 기색을 떨칠 수 없다. 만남은 즐겁다. 하지만 동시에 공허하다. 분명 웃고 떠드는 순간은 즐겁지만 그 이후 다시금 밀려올 후폭풍을 잘 인지하고 있다. 게다가 여자는 자신이 여성이라는 것에 대해 엄청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다. 아마존의 여전사 마냥 자신의 가슴 덩어리를 도려냈으면 좋겠다 생각한다. 날개쭉지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를 바리깡으로 밀고 뒷통수에 커다란 문신을 새기는 꿈을 꾼다. 누가봐도 애교많고 글래머러스한 여자지만, 여자는 다음 생에는 꼭 남자로 태어나리라 결심한다. 성정체성의 문제가 아니다. 차라리 세상에 남녀 성별이 존재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여자라는 틀안에서, 남자라는 틀안에서 익혀지고 억압된 모습이 싫을 뿐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세상에 남녀가 아닌 "사람"만이 남는다면 많은 문제들이 사라질 것 같다. 동성애 문제도, 썸이니 연애니 하는 문제도. 성별에 구애받지 않고 사람을 사람으로만 보고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굳이 엄마와 아빠가 생기는 대신, 엄마 둘이나 단순히 "보호자들"이 탄생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가령, 지금 저 남자가 내가 여자이기 때문에 거는 은근한 기대(?)도 무시할 수 있을터이니. 저 남자가 던지는 섹드립에 대놓고 엿을 먹일 수도, 그대로 받아쳐줄 수도 있으리라. 여자라서 사람 대 사람을 만나는 일에 커다란 장벽이 생긴다는 걸 서서히 몸소 느끼는 나이였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속물인지 순진한 척 하는건지 스스로도 헷갈리기 시작한다.
나누는 대화는 시시콜콜하다. 한 달 사이 어떻게 지냈는지 별 생각없이 웃을 수 있는 얘기들이다. 여자는 간밤에 디즈니 영화를 한 편 보았다 한다. 슈퍼히어로가 나오는 이야기인데 나름 재밌었다고 남자에게 추천을 한다. 아하하- 진짜 여자 맞네, 디즈니 영화 좋아하는 거 보면요. 남자는 크게 웃어제끼며 말한다. 왜요- 남자들은 디즈니 안보는거 아니잖아요? 디즈니 싫어하는 사람도 있나? 말을 내뱉으면서도 문득 자신이 언제부터 콧소리를 냈나 여자는 생각한다. 타고났다고 해야하나, 나이 먹어가며 학습된 습관인가. 다시 한번 자신이 부정할 수 없는 여자라는 사실에 여자는 조금 자괴감을 느낀다. 아, 보긴 보죠. 다만 좀 다른 관점에서랄까? 남자는 스파게티를 포크로 돌돌 돌려가며 말한다. 예를 들어... 왜... 엘사는 섹시하다? 여자는 자신도 모르게 입으로 가져가던 포크를 내려놓는다. 순간 성별의 존재론은 필연적이구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남자는 벙찐 여자의 표정을 보고 신이 나 말을 잇는다. 에이, 영화에서 엘사도 성인인데 뭐 어때요. 그거 알아요? 제일 뭐 같은건 엘사 야동도 있다는 거죠. 엘사 코스프레 해놓고 별짓거리 다하는 인간들 정말 많아요.
아, 그렇구나. 여자는 잠시 숨을 들이쉬었다 말한다. 그런거 되게 잘 아시네요? 여자는 덤덤한 척 내려놓았던 포크를 다시 입가로 가져간다. 샐러드에 면이 섞인 스파게티에서 풀떼기만 골라먹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또 다시 자괴감에 빠진다. 아니, 내가 보고 싶어 본게 아니고 친구가 링크를 보내주더라고요. 뭔지 모르고 눌렀는데 보고 진짜 fucked up 됐다 그러고 꺼버렸죠. 남자의 반론이 시작된다. 여자는 음- 음- 성의없게 대꾸하며 빨대 꽂은 물을 들이킨다.
어쩌면 처음부터 남자와 여자의 문제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여자는 생각한다. 자신의 가슴 두 덩어리를 떼어 남자처럼 배에 덧댄다 하여도 크게 달라질 건 없을 것이다. 영양가 없는 대화가 좀 더 오가고 남자는 핸드폰을 힐끗거리기 시작한다. 밥 다먹었으니 그만 일어나죠- 여자가 먼저 말을 꺼낸다. 아, 네, 끝나고 운동 가야해서요. 남자는 미안하다는 손짓을 보내며 카톡을 한다. 운동하세요? 같이 운동하는 친군가봐요? 여자는 애써 무심한 표정을 지으며 대꾸한다. 아, 사실 개인레슨이예요. PT 받기 시작했거든요. 순간 여자의 시선은 자기도 모르게 남자의 배로 향한다. 이번에는 확실히 두 사람의 시선이 남자의 볼록 나온 배 위에 겹친다. 꿀꺽. 1초의 정적이 흐른다. 갈까요? 여자는 싱긋 웃어보이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이번에는 남자도 실없이 웃어제끼지 않는다. 식사 너무 맛있었어요. 레스토랑을 나오며 여자는 자신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내뱉는다. 네, 저도 오랜만에 만나서 즐거웠어요. 남자도 영혼없는 대답을 한다. 지하철 타는 모습을 보고 가겠다는 걸 급구 말린 후 여자와 남자는 반대 방향으로 헤어진다. 아마 여자가 아니고 남자가 아니기에는 이미 너무 멀리오지 않았나. 달리는 지하철 창가에 비친 제 모습을 보며 여자는 가슴 위에 살포시 손을 얹어본다.
<말장난: 태어나버린 이들을 위한 삶의 방법론> 中 "C컵 여자"
모두가 한번쯤은 마주해야 할 깊은 무의식으로 떠나는 성장형 에세이. 숨겨두었던 기억 속 어둠을 의식 밖으로 끌어내어 내면의 아이를 자유롭게 해주는 치유의 여정. 태어나버린 모든 이들을 위한 서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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