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넬의 서재 Oct 27. 2024

할머니의 정체된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어느 치매 노인의 일기> 9편

*<어느 치매 노인의 일기>는 90대 치매 할머니와 60대 딸, 20대 손녀가 함께 살며 겪는 따듯하고도 슬픈 이야기를 엮은 장편 소설입니다. 본 소설은 완결까지 탈고된 상태로 브런치 공모전 용도로 맛보기차 업로드합니다. 공모전이 끝나면 다시 처음부터 한 편씩 업로드될 예정입니다. 감사합니다!





잎싹이 돋고, 벚꽃이 필 때쯤, 할머니는 큰딸을 쫓아 큰딸네 동네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늘 짚고 다니는 알루미늄 지팡이를 들고, 큰딸을 따라 열심히 동네를 탐방했다. 한평생 섬유근육통으로 고생한 큰딸은 운동을 철칙같이 여겼다. 이런 큰딸에게 새 집은 산책에 최적화된 곳이었다. 


아파트에 사는 둘째딸네와 달리, 주택단지 동네에 사는 큰딸네 집 근처에는 호수가 있었고 푸르른 산이 있었다. 아파트 단지를 돌던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탁 트인 자연 속에서 할머니는 숲속 마을에 온 듯 놀라워했다. 그러나 놀라움도 잠시, 앉을 곳만 보이면 다리가 풀려 주저앉았다. 그래도 의지력으로 뒤쳐지지 않는 할머니는 헥헥거리면서 큰딸을 쫓아 산책을 다녔다. 


할머니는 잘 몰랐지만 큰딸은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치솟아오르는 집값 때문에 외곽까지 내려온 것이었다. 코로나로 인해 자영업자들이 망하고 부동산 시장이 폭등하던 때였다. 사실상 쫓겨난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기적적으로 이 집을 구한 것에 큰딸은 감격했다. 다시는 애착 가질 집을 가질 수 없을 줄 알았던 큰딸은 뜻밖의 도심 속 자연에 마음을 빼앗겼다. 덕분에 서울에서 20년을 살다 떠난 섭섭함과 외로움은 많이 가실 수 있었다. 


할머니는 지난 도시 생활 동안 푸른 자연을 본 기억이 별로 없었다. 할머니가 처음 도시에 올라왔을 때, 둘째네 가족들은 최대한 할머니를 데리고 놀러 다녔다. 그러나 차를 타고 멀리 놀러 가기엔 할머니의 체력이 따라주지 않았다. 결국 둘째딸네 가족들은 할머니를 집에 놓고 다닐 수밖에 없었다. 할머니는 그렇게 서서히 집 밖의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를 까맣게 잊어갔다. 


아파트 단지에 나름 공원을 꾸며 놓았지만, 자신이 살던 시골에 비하면 도시에는 자연 같은 건 찾아볼 수도 없었다. 아파트 내의 정자에 앉아있으면 늘 바람 냄새와 자동차 매연이 섞여 불어왔다. 그러나 큰딸네 집 근처는 달랐다. 할머니는 시골을 떠난 뒤 처음으로 도시 속의 인공 자연이 아닌 진짜 자연 속을 따라 걸어다니며 신기해했다. 


산책길을 따라 걸으면 봄이 비비고 간 듯 풀 냄새가 났고, 꽃 향기가 났다. 낮에는 나비가 날아다녔고, 밤에는 개구리나 귀뚜라미가 울었다. 집 근처의 공터에는 호박잎이나 배추가 자라 할머니가 키우던 밭을 연상시켰다. 조금 더 무리해서 걸으면 하천으로 이어지는 호수도 보였다. 호숫가를 따라 자란 커다란 버드나무가 바람 소리에 솨솨 울었다. 호수 위에는 오리 가족과 백로 부부가 한 번씩 모습을 드러냈다. 


할머니는 탁 트인 호숫가 앞에서 큰딸과 몇 시간을 앉아 “아~ 좋다”를 연발했다. 산책길은 한적한 산책로 입구까지 들어오는 마을 버스를 제외하고 차도 많지 않았다. 맑은 공기 덕분인지 이곳의 하늘은 유난히 맑고 높았다. 호숫가에 서서 건너편 산을 바라보면 구름 그림자가 산등성이를 쓱 스치고 갔다. 밤에는 별이 울었고, 달밤이 차고 기울었다. 


산을 반쯤 깎아 만든 마을에는 복층 전원주택들이 오순도순 들어서 있었다. 산마을 정상까지는 걸어서 15분이면 도착했다. 산꼭대기에는 동네 사람들이 오는 자그마한 절도 있었다. 한동안 역마기가 잠잠했던 할머니는 그렇게 상상치도 못한 자연광경에 또 한번 콧바람이 들었다. 


할머니는 정체되어 있던 자신의 시간이 다시 세차게 흐르는 것을 느꼈다. 저수지 한가득 품고 있는 호수만큼 자신의 시간에도 깊이가 생겼다. 예전엔 무언가 채울 공간도 없었다면, 지금은 마음먹기에 따라 세상 어떤 것들을 담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한 번 동네를 구경한 할머니는 큰딸네 집에만 오면 산책을 나가자고 큰딸을 들들 볶았다. 하루 종일 멍 때리던 시간 속에 새로운 생명이 피어났다. 이제 할머니의 시간은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나는 길가의 호박과 서서히 걷기 더 수월해지는 산책길, 호숫가의 촉촉함을 담고 불어오는 바람 같은 걸로 채워졌다. 


할머니는 아파트 단지를 돌던 것의 5 배는 되는 거리를 큰딸과 열심히 걸었다. 할머니는 그 커다란 호숫가 뚝방길을 따라 걸었고, 비스듬한 산길을 따라 마을을 구경 다녔다. 자신이 살아온 길을 걷는 것처럼 산길을 돌고, 물길을 따라 걸었다.


시간이 지나 몇몇 마을 사람들이 조금씩 할머니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둘째딸네 동네에서 그랬던 것처럼, 사람들은 조그마한 할머니가 너무 정정하시다고 치켜세웠다. 할머니 연세가 어찌 되냐고 묻거나, 모녀가 함께 다니는 모습이 좋다고 칭찬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간혹 다른 노인들이 딸내미가 이렇게 잘 챙겨줘서 복이 참 많으시다고 부러워하며 지나갔다. 그러면 할머니는 칭찬에 얼굴을 붉히며 “우리 애기들이 그르케 잘해요”라고 인사했다. 


너무 먼 길을 걸을 때는 큰딸은 할머니 다리가 후들거릴까 봐 아예 등산가방을 하나 마련해 돗자리, 휴지, 간식, 물 등을 싸가지고 다녔다. 할머니 발걸음에 맞추느라 자기 운동도 못하게 됐다고 투덜거렸으나 등산가방을 싸서 나왔다. 가다가 힘들면 “아이고, 죽겄다”하며 아무 곳에나 주저앉는 할머니를 위해 돗자리를 깔고 물을 내주었다. 


꼬박꼬박 산책을 하게 된 할머니를 보고 모두 기적이라며 놀라워했다. 매일 한 시간씩 산책을 한 할머니의 앙상한 종아리에 근육이 붙었다. 할머니가 걷는 거리는 운동 부족인 현대인의 하루 평균 정도 운동량이었다. 식욕도 왕성해지고, 치매 증상도 나아진 할머니는 예전만큼 바지에 실수하지도 않았다. 덕분에 할머니는 노인 기저귀도 졸업할 수 있었다. 


둘째딸은 이렇게 건강하고 정정한 할머니를 본 적이 없다고 깜짝 놀랐다. 할머니는 튼튼해진 다리를 자랑이라도 하듯 둘째딸 앞에서 계속 왔다 갔다 얼쩡거렸다. 둘째딸은 언니가 이사 온 뒤로 할머니도 자기도 삶을 되찾은 것 같다고 환하게 웃어 보였다. 어쩌면 둘째아들이 돌아온 뒤로, 자식들이 모두 자주 할머니를 보게 된 것도 도움이 됐는지도 몰랐다. 자신의 희생으로 다섯 형제자매가 십여 년 동안 편안했던 것처럼, 둘째딸도 언니의 도움으로 숨통이 조금은 트인 걸 느꼈다. 




10편에서 계속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