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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넬의 서재 Sep 29. 2020

노인이 된 내가, 철없는 나에게

어린 내가 불안할 때는, 늙은 나라는 당신께 조용히 기도를 올린다 

네 살 적의 아빠 손 잡고 부엌으로 향하던 나를 꺼내보고, 열여섯살 적 부모님이 찾는 줄도 모르고 밤새 놀이터에서 동네 언니와 수다 떨던 나를 꺼내본다. 서른넷, 한참 공부가 무르익어 있을 나를 엿보아 불러내고, 마흔의 한 공주님의 어머니가 되어있는 나를 꺼내 불러본다. 이제는 그저 잠잠히 행복을 찾고 삶을 영위하는 육십의 나를 부른다. 그리고 여든에 글을 쓰고 있는 나를 불러다 쓸데없는 걱정에 발목 묶여 나아가고 있지 못하고 있는 지금의 나를 꾸짖어 달라 부탁한다. 앞으로 나아갈 길이 멀고도 아름다우니, 정신 차리고 어깨를 당당히 피라고. 당신은 아직 철없기만 한 내 등짝을 쓸어내리며 조용하지만 엄한 목소리로 말한다. 나아가라고. 당신 잘해낼 거라고. 잘해내왔다고. 


그러면, 나는, 당신의 지나온 세월이 베어나오는 옷냄새에 그저 머리를 박고 한참을 흐느껴 운다. 내가 찾던 사람 향내가 당신에게서 오롯이 묻어 나오는게, 장하고 기특하기에. 그리고 언젠가는 그 향내를 내 몸소 피워보고 싶단 소망이 간절해지기에. 곱게 주름진 당신 손과 얼굴을 쓸어내리며 어린 내가 늙은 당신을 안고 고맙다고 눈물을 흘린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어린 내가 당신 하얘진 머리를 연신 끌어안고 고맙습니다- 고생많으셨습니다- 하고 토닥여준다. 


어느 순간 한 살 적 나부터 여든의 당신까지 우리를 둘러에우고 축가를 불러준다. 하늘의 길이 열리고, 비단 옷을 입혀주고, 얼굴에 분을 발라주며. 당신은 아름답습니다- 그렇게 자랑스럽다 치켜세워준다. 이마에 새빨간 핏덩어리를 달고 태어난 나는 늙은 당신의 품에 안겨 이제 막 박차고 나온 세상을 향해 울어댄다. 당신은, 비단 옷을 입고 성스럽도록 아름다운 용모를 지닌 당신은, 말없이 나의 탯줄을 끊고 당신 비단 옷으로 몸의 그 핏덩어리를 닦아준다. 늙어 쭈그러진 가슴은, 어느새 풍만한 모유로 차올라 핏덩이에게 젖을 물린다. 이 경건함을 바라보는 지금의 나에게 당신은 그저 말없이 따스한 미소만 지어보인다. 그 모습에 뭐라 함부로 입을 열지 못하고. 그저 나머지 "나"들과 함께 쉼새없이 눈물만 흘린다. 


외로움에 휩싸인 십대의 나, 두려움에 질려버린 스무살의 나, 삶에 짓눌려 지쳐있는 마흔의 나, 더 이상 크게 바랄 것없다 웃고 있는 예순의 나를 두고. 제일 연로하신 당신은 그저 이제 막 세상에 태어난 핏덩이에게 환영의 젖을 물린다. 앞으로 아주 많이 힘들고 외로울테지만, 태어나줘서 고맙다고. 당신은 존귀한 존재라고. 아름다우시다고. 늘 그렇게 아름다운 모습 잃지말고 커가시라고. 그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그 핏덩어리에게 자꾸만 젖을 물린다. 눈속에 박힌 보석 잃지 말라고. 갓 태어난 나는 당신 마음 다 안다는 듯 깨끗한 눈으로 나에게 젖을 물리는 늙은 당신을 똘망똘망 바라볼 뿐이다. 




<말장난: 태어나버린 이들을 위한 삶의 방법론> 中 "어린 나와 늙은 당신" 


모두가 한번쯤은 마주해야 할 깊은 무의식으로 떠나는 성장형 에세이. 숨겨두었던 기억 속 어둠을 의식 밖으로 끌어내어 내면의 아이를 자유롭게 해주는 치유의 여정. 태어나버린 모든 이들을 위한 서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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