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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넬의 서재 Oct 09. 2020

죽음 직전에 깨달은 삶의 비밀

죽기 직전 노인이 된 내가 나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종종 빨리 늙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주름살이 패이고, 검버섯이 피고, 손등이 쭈글쭈글한 할머니가 된다. 단지 멀찍이서 세상을 바라보며 지혜를 속삭이고 있는 나이의 내가 있다. 더이상 오늘 내일 죽어도 이상할 것 없는 나이에 세상 속에 살아가면서도 세상에 의해 좌지우지 되지 않는 나즈막한 노인. 세상 모든 것을 가슴으로 껴안고, 눈빛 닿는 곳마다 사랑이 묻어나오며, 깊은 주름만큼 잔잔히 퍼지는 미소에 나는 오래도록 찾던 삶의 의미와 숭고함을 찾을 것이다. 


이는 어쩌면 내 철없는 성급함과 잠재우지 못하는 불안을 빨리 뛰어넘고자 하는 비겁함일지도 모른다. 어린 마음을 감추지 못해 초연해보이는 것들에 대한 나의 맹목적 동경일지도 모른다. 늙은 내가 더이상 불안하지 않을 거란 보장 또한 없다. 내가 반드시 지혜로워질 것이란 보장도 없으며, 오히려 지금보다 더 어린아이와 닮아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에 대한 불안보다 삶에 대한 불안으로 살아온 나이기에, 나는 죽음을 앞둔 적지않은 내 나이를 앞두고 비로소 나를 받아들이고 평안을 찾을 것이다. 


나는 오히려 반가워할 것이다. 내가 살아온 시간들에 감사해하면서도 그것들에 얽매이지 않고 나는 조용히 떠나고자 할 것이다. 내가 평생 흘린 눈물은 비로소 나를 태우고 증발할 것이다. 죽음 이후 무엇이 기다리는지는 그닥 중요하지 않다. 나는 비로소 내가 사랑했던 모든 것을 두고 떠날 것이며, 단지 그 속에 티끌만한 후회가 없기를 기도할 뿐이다.


내가 세상을 사랑했던만큼 세상이 나를 위해 울어줄 필요는 없다. 내 탄생이 급작스러웠던 것만큼 내 죽음 또한 소리없이 나를 거두어주길 바란다. 내가 죽는 순간, 세상에 나를 위해 울어준 사람 하나 남겨놓지 못한다해도, 내가 세상을 사랑했기에 그 속에 원망도 증오도 없을 것이다. 내가 당신을 사랑했기에, 나는 기쁜 마음으로 기꺼이 하늘로 올라갈 것이다. 나는 처음부터 이름없이 내려왔고 또 이름없이 돌아가기에. 나의 세상에 대한 사랑은 내 소망대로 결국 죽음으로 회답 받을 것이다. 


죽음 앞에선 노인은 비로소 세상을 온전히 이해할 것이며, 그 속에서 자신이 한평생 찾던 안식처가 자기 속에 있었다는 걸 깨달을 것이다. 그가 찾아다니던 사람 또한 다름 아닌 나 자신이었으며, 죽음 앞에서야 당신 발에 입을 한번 맞추고 떠날 수 있음에 감사의 눈물을 흘릴 것이다. 그때 노인의 얼굴은 더이상 노인의 것도, 어린아이의 것도, 여자의 상도, 남자의 상도 아닐 것이다. 그대의 육신은 더이상 너무나 커져버린 당신의 영혼을 담을 수 없기에, 얼굴없는 하나의 빛이 될 것이다. 스스로 빛을 발하다 못해, 빛이 되어 세상을 떠나는 당신을 나는 그저 땅 위에서 올려다 볼것이다. 


아무것도 남기고 싶지 않다는 당신의 오랜 희망대로, 당신의 빛은 많은 이를 어루만지지만, 어느새 또 곧 잊혀질 것이다. 당신의 마음을 결코 온전히 전해지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가히 글로도 말로도 기록될 수 없는 것이기에. 그저 당신은 아무도 모르게 들렸다가 떠난 세상의 손님이었기에. 당신의 떠나감의 유일한 목격자인 나는 아마 당신을 위해 울지 않을 것이다. 혹여나 흐르는 눈물이 있다면 그것은 분명 당신을 향한 기쁨과 축복의 눈물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당신을 금방 잊을 것이다. 당신의 육체적 부재와 상관없이 당신이 보여준 빛으로 나는 일정 기간 살아가다 이내 당신을 배신할 것이다. 아직 한없이 어리석은 나는 어지러운 세상속에서 당신이 저질렀던 똑같은 실수들을 반복할 것이다. 


그러다 문득, 바람 속에서 당신의 체취를 맡고, 부서지는 햇살 속에서 당신을 느낄때, 나는 그저 말없이 하늘을 향해 한번 웃어보일 것이다. 더 이상 당신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기에. 더 이상 당신의 목소리를 기억할 수 없기에. 늘 당신을 그리워하지만 그리워하지 않기에. 나는 당신을 잊을 것이다. 이미 당신이 떠나버린 세상 속에 아직 나에게 남은 건 당신이 내 속에 심어준 미소 그 하나일 뿐이다. 그 미소 하나로 당신의 삶이 축약되기에. 그 웃음이 당신이 떠나기전 내게 남겨주고자 했던 것이기에. 하지만 어느 순간 그 미소조차 잊혀지고 나는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내가 다시 노인이 되는 날, 나는 당신의 미소를 뒤늦게 기억하고 나를 또 한 번 떠나보낼 것이다. 내가 세상을 떠나는 날은, 그렇게 내 생애 가장 행복한 날로 남았다 지워질 것이다. 




<말장난: 태어나버린 이들을 위한 삶의 방법론> 中 "노인" 


모두가 한번쯤은 마주해야 할 깊은 무의식으로 떠나는 성장형 에세이. 숨겨두었던 기억 속 어둠을 의식 밖으로 끌어내어 내면의 아이를 자유롭게 해주는 치유의 여정. 태어나버린 모든 이들을 위한 서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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