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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닐슨 Apr 02. 2021

섬뜩한 꿈

조각 수필 #11

섬뜩한 꿈이었다.

자리를 고쳐 앉아 흐르지도 않은 땀을 손으로 닦았다.

누구나 꿈을 꾸지만 이번에 내가 꾼 꿈은 조금 다른 꿈이었다. 분명 나는 다른 꿈을 꾼 게 틀림없었다.


꿈에서 내 나이는 겨우 일곱 살 정도. 어린아이였다.

동네 아이들이 모두 같은 기차를 타고 있었다. 하지만 누구인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낯선 아이들이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여자아이가 있었는데 이름도 얼굴도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다.


기차여행을 하는 게 처음인지 남자아이들은 기차 안에서 박수를 치며 노래를 불렀고 여자아이들도 서로 기분 좋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몇몇 아이들은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객실 의자 사이를 뛰어다니며 들떠있었다. 간혹 여자아이를 짓궂게 대하는 남자아이도 있었지만 오래가지는 않았다. 

기차 안에서 내 이름을 불러주는 아이는 아무도 없었다. 마치 내가 자신들과 다른 부류인 것처럼 나를 가깝게 대하지 않는다고 느꼈다.


“우와, 저길 봐. 기차가 엄청 빨라.”

“의자도 엄청 푹신해, 기차도 되게 깨끗하잖아.”


나 혼자 사용하기엔 지나치게 커다란 의자에 앉아 아이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엄마와 떨어져 먼 친척집에 갔을 때의 외로움과 낯섦을 느끼던 그 기분과 비슷했다.


소리도 없이 객실의 문이 열리고 <어른 여자>가 나타났다.

티켓 검사인 걸까, 주머니를 뒤졌지만 내가 입고 있던 옷에는 주머니가 없었다.  자신을 누나라고 소개한 푸른 유니폼의 <어른 여자>, 여자는 손에 걸고 있던 바구니에서 사탕과 음료수를 나눠주며 아이들의 이름을 하나씩 부르며 쓰다듬어 주었다. 많은 수의 아이들의 이름을 모두 외우고 있다는 게 신기했다. 티켓 검사 따위는 필요하지 않았다. 나에게 다가왔을 때에도 환한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사탕과 음료수를 나눠주지 않았다. 

기차 안에서 나는 이방인이었다. 함께할 수 없는…….


얼마를 달렸을까.

떠들고 놀던 아이들이 지쳤는지 몇몇은 웅크리고 잠을 자고 있었고 다른 몇몇은 창밖을 보며 집을 그리워하는 듯해 보였다. 어떤 여자아이는 감수성이 넘쳤던 것인지 창 밖의 흰 구름을 보면서 눈물이 고여있기도 했다.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목적지가 어디인지, 내가 어디를 가는 것인지 여전히 알 수 없었다. 

기차는 허공을 달려온 것일까. 넓은 공터에 도착한 기차 바퀴 아래에는 레일이 사라지고 없었다. 사라졌다기보다는 달려온 만큼 레일이 지워졌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 될 것 같다.


기차에서 만났던 푸른 유니폼의 <어른 여자>는 아이들의 손을 잡고 한 줄로 길게 세워 어느 집으로 이끌고 있었다. 재개발을 앞둔 것처럼 보이는 마을. 스산했다. 무너진 담벼락과 버려진 타이어 따위가 뒤엉켜있었다. 사람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아이들이 줄을 지어 들어가고 있는 집은 많이 낡아있었다.

닫히지도 않을 것 같은 파란색 대문은 군데군데 녹이 피어있었다. 아이들은 <어른 여자>가 이끄는 대로 집으로 들어갔다.


현관에 신발을 벗고 차가운 마룻바닥에 올라섰다. 신발을 벗자마자 다시는 신으면 안 되는 것처럼 신발이 사라졌다.

집은 생각보다 많이 좁았다. 조명도 제대로 켜지지 않았는지 무척 어두웠다. 차가운 마룻바닥이 깔린 복도는 미로처럼 복잡하지는 않았지만 여러 차례 모퉁이를 돌아 어딘가로 연결되어있었다. 그 기다란 마룻바닥에 아이들이 순서대로 줄지어 앉았다.

우리를 데리고 온 <어른 여자>는 사라지고 없었다. 


아이들은 좁은 복도에 두 줄로 나란히 앉아있었다. 무언가 차례를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아이들의 수는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어딘가에서 또 다른 기차가 도착한 것인지 나와 함께 기차를 타고 온 아이들의 얼굴과 또 다른 낯선 얼굴이 섞여 있었다.


아이들이 줄지어 앉아있는 제일 끝에는 작은 흰색 문이 달려있었다. 

어린 내가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야 할 만큼 작은 문이었는데 꼭 어릴 적 살던 집의 부엌과 방 사이에 달려있는 문처럼 보였다. 

첫 번째 아이가 들어갔다. 수 분의 시간이 흐른 후에 두 번째 아이가 들어갔다. 그리고 역시 잠시의 시간, 세 번째 아이가 들어갔다. 그렇게 십 수 명의 아이가 차례로 들어갔다. 하지만 다시 나오는 아이는 한 명도 없었다. 


방이 아무리 커도 들어간 아이들이 나오지 않는다는 건 방에 또 다른 출구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던 때, 내 순서가 되었다.

나 역시 앞의 아이들이 했던 대로 고개를 숙이고 방에 들어설 때 방 안쪽, 왼편으로 작은 검정 문이 보였다. 그 문으로 바로 앞에 들어갔던 아이가 들어가는 뒷모습을 볼 수 있었다. 검정 문 안쪽에는 어딘가로 연결되는 검정 계단이 있었다.


방은 내 생각보다 훨씬 더 작았다. 하지만 고개를 숙인 탓이었을까, 천정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았다. 아니 천정이 없는 방이었다. 

검정 문 바로 앞에 작은 앉은뱅이책상이 놓여있고 그 위에는 두꺼운 책이 한 권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눈동자가 보이지 않을 만큼 두꺼운 유리알 안경을 쓰고 흰 도포를 입고 앉아있는 남자가 고개를 들지도 않고 내게 물었다.


“이름!”

“ㅇㅇㅇ이요.”


책장을 넘기며 내 이름을 찾았다.


“ㅇㅇㅇ이 맞아?”

“네. ㅇㅇㅇ이예요.”


남자는 다시 처음부터 손가락을 짚어가며 책에서 내 이름을 찾았다. 자세히 보니 손가락이 아니라 숟가락이었다. 더 이상 제 역할을 하지 못할 만큼 낡아있는 숟가락으로 책에 쓰여있는 아이들의 이름을 짚어가며 내 이름을 찾고 있었다.


“허허… 네 이름 없어. 뭔가 착오가 있군. 다시 돌아가.”


기차를 함께 타고 온 아이들 중에 흰색 문을 열고 되돌아 나온 사람은 내가 처음이었다. 

차례를 기다리던 아이들은 나를 쳐다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나는 좁은 마루를 지나 현관을 찾았고 다시 신발을 신었고 낡은 파란 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또 다른 아이들을 태우러 간 것인지 기차는 없었다. 다만 기차가 놓여있던 그 자리에 바퀴의 흔적은 남아있었지만 여전히 레일은 지워지고 없었다.


이게 내가 꾼 꿈의 내용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어떤 어른>에게 꿈 이야기를 했더니 아마도 황천 가는 기차를 탔던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름이 적혀있던 책은 망자의 이름이 적혀있었을 거라는 이야기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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