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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닐슨 Feb 24. 2021

김치 국물, 그리고 잔소리

조각 수필 10

식사를 할 때마다 듣게 되는 잔소리가 있다.

제발 음식을 흘리지 말아 달라는 아내의 부탁 같은 잔소리다.


왜 그리 흘리며 먹는지 나도 알 수 없다. 찌개를 떠먹을 때면 한 두 방울을 흘리는 건 기본이고 배추김치나 총각김치를 집어먹으면 꼭 빨간 김치 국물이 떨어진다. 그것도 아주 절묘하게 그릇 바깥쪽으로 딱 한 방울, '똑' 하고 떨어진다. 절묘한 위치에 떨어진 김치 국물은 나를 곤혹스럽게 만든다. 정확히 한 방울만 바로 저 자리에 떨어뜨려야겠다고 마음먹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식사를 마치고 식탁을 정리할 때면 내가 앉았던 자리는 한바탕 전쟁을 치른 것처럼 보인다. 젓가락을 내려놓았던 흔적이라던가 숟가락을 따라온 찌개국물의 흔적이 반드시 남아있다. 콩나물국이나 미역국 같은 맑은 국을 먹은 날은 덜하지만 걸쭉하고 색이 진한 된장찌개나 김치찌개로 식사를 마친 날이면 대번에 눈에 띄는 흔적이 적나라하게 남는다. 말라붙어가는 밥풀이나 작은 멸치 한두 마리도 간혹 발견할 수 있다.


아내의 잔소리에 나의 항변은 같은 말 뿐이다.

일부러 흘리는 것도 아니고 치밀한 계획을 세워서 그런 것도 아니라는 애원 섞인 투정이다.

잔소리를 여러 번 듣다 보니 어떻게 하면 흘리지 않을까에 대해서 고민도 해보았다. 흘리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식사를 했더니 밥을 먹는 것인지 아내의 눈치를 살피는 것인지 구분이 되지 않아 식사하는 내내 불편했다.




TV를 보면서 식사를 하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동물의 왕국에서 원숭이가 먹이를 먹는 장면이 나왔다.

원숭이는 음식을 줄줄 흘리기도 했고 양손 가득 찐득거리는 과일을 이리저리 만져가며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내가 식사하는 모습과 겹쳐 보였다.

도구를 이용해 밥을 먹는 행위가 학습에 의한 것일까. 아니면 손이 더럽혀지는 것을 예측했기 때문인 것일까. 손이 더럽혀질 거라는 이치를 경험 없이 예측한 것이라면 바로 그것이 곧 다가올 미래를 알 수 있기 때문은 아닐까.


인간이 높은 곳에서 공포를 느낀다던가 달려오는 자동차에 뛰어들지 않는 것이 직접경험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물론 그런 엄청난 일을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 알고 있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들도 직접경험 이전에 간접경험 - 영상이나 사진을 이용한 학습 등을 통해 이미 알고 있기에 이후에 일어날 상황에 대해 인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즉, 결과를 미리 알고 있었다는 말이다.

직접경험이든 간접경험이든 혹은 경험이 없었더라도 인간에게는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에 그 두려움을 미리 깨닫고 사전에 준비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구나 싶다.


도구를 사용해서 음식을 먹는 일 역시 짧은 미래에 대한 예측을 할 수 있기 때문에 - 손에 음식물이 묻고 음식을 흘릴 것이 자명하기 때문에 숟가락이나 젓가락이라는 도구를 사용해서 식사를 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원숭이와 다른 점이라면 바로 그것이 아닐까.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예측할 수 있다는 것.


아내의 잔소리를 모르는 바는 아니다.

흘린 음식을 치워야 하는 번거로움과 흘린 것을 모르고 여기저기 묻혀놓을 걱정 때문일 것이다. 아직 일어나지 않았고 오지 않은 미래를 예측할 수 있기에 걱정을 하는 것이다. 바로 그 걱정이 지금을 살아야 하는 사람들을 힘들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태초의 인간이 따먹었다는 선악과에 일어나지 않은 일을 예측하는 능력이 들어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며 받은 형벌이 바로 그 "걱정"이란 녀석일 수도 있다.


어니 젤린스키는 자신의 책 <모르고 사는 즐거움>에서 걱정의 40%는 절대 현실적이지 않은 것이고 30%는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한 것, 또 22%는 아주 사소한 것이고 4%는 우리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것들 또 4%는 우리가 바꿀 수 없는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실제로 걱정이라는 것이 정말 불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오늘 식사는 걱정 없이 실컷 흘리면서 먹으련다.

"아내여, 제발 잔소리는 그만해주시오. 나는 지금 이 순간, 내 입에 들어가는 밥 한 숟가락에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 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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