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 수필 #29
나는 우선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돈이 한 삼백만 원쯤 생기기도 하는 생활을 사랑한다. 그러면은 그 돈으로 온라인 서점의 서재에 담아둔 책을 주문하고 싶다. 푹신한 소파에 누워 하루에 한두 번씩 낮잠을 자며 책을 읽고 싶다. 그리고 아내에게 널찍한 부엌을 만들어 주고 싶다. 아내는 신이 나서 도마질을 할 것이다. 나는 삼백만 원, 아니 천만 원쯤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돈이 생기는 생활을 가장 사랑한다. 그리고 나는 나의 시간과 기운을 다 팔아 버리지 않고 다시 한번 세계여행을 떠나고 싶다.
나는 물에서 노는 것을 좋아한다. 젖은 모래사장에 앉아있는 것을 좋아한다. 가끔은 딱딱한 밑창의 구두를 신고 복도 걷기를 좋아한다. 봄이면 새로 나는 나뭇잎 만지기를 좋아한다. 나는 보드랍고 고운 밀가루를 만지기 좋아한다. 나는 낯선 여자의 머리카락을 스쳐 지나온 바람에서 나는 샴푸 냄새를 좋아한다. 그리고 아내에게 좀 미안한 생각을 한다.
나는 입이 큰 얼굴을 좋아한다. 거기에 턱이 각이 져 있는 얼굴을 더 좋아한다. 그러나 수수한 얼굴이 웃는 것도 좋아한다. 아내가 나를 바라보고 웃는 얼굴도 좋아한다. 나 아는 여인들이 인사 대신으로 동그란 눈을 뜨는 웃음을 나는 좋아한다.
나는 투명한 푸른색을 사랑한다. 발 딛는 곳마다 처연히 부서지는 파도, 앞을 바라보며 걸음이 급하여지고, 뒤를 돌아다보면 나를 따라온 내 발자국을 두고 가는 것 같아 잠시 머뭇거린다. 나는 마흔여덟 가지 색의 크레파스에 파란색, 녹색, 옥색이라 붙어있던 색깔을 좋아한다. 나는 우리나라의 바다를 사랑한다. 나는 쪽빛 하늘을 좋아한다. 그 하늘을 날고 있는 흰 새를 좋아한다. 나는 운동 후 마시는 이온음료의 파란색을 좋아한다.
나는 한 밤의 접동새 소리를 좋아하며, 멀리서 들리는 개 짖는 소리를 반가워하며, 아무도 밟지 않은 눈을 밟을 때 만들어지는 뽀드득거리는 소리를 즐긴다. 빠르게 지나는 기차소리를 좋아하며, 뱃고동 소리를 들으면 아직도 가슴이 뛴다. 나는 골목을 지나갈 때에 들리던 이제는 사라진 계란이나 두부 따위를 파는 장사꾼의 소리를 좋아한다.
나는 사춘기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좋아한다. 멀리서 들리는 희미한 음악소리를 좋아한다. 나는 비 오는 날 저녁때 엄마가 끓여주던 콩나물국 냄새를 좋아한다. 새로 사 온 타월의 냄새, 세탁소의 냄새를 좋아한다. 석간신문에서 풍기는 인쇄소 냄새, 커피 끓이는 냄새, 짙은 벌꿀 냄새, 히비스커스, 캐모마일 같은 차 냄새, 잘 마른 장작의 냄새를 좋아한다. 비 온 후의 흙냄새를 좋아한다.
나는 수박을 좋아하고 망고와 바나나를 좋아하고, 혼자서 차를 마시기를 좋아한다. 작은 박하사탕을 외투 호주머니에다 넣고 길을 걸으면서 먹기를 좋아하고, 붉은 담장 아래에 쪼그리고 앉아 아껴먹던 달고나를 좋아한다.
나는 작은 나의 집을 좋아한다. 봄에 피는 꽃 이름이 붙어있는 아파트라 더 좋아한다. 아침마다 햇볕이 들어오는 작은 베란다가 있고 집 값을 올려달라는 말을 아니 들을 터이니 좋다. 내 모든 물건들이 언제나 제자리에 있고 앞으로 오랫동안 살 수 있어 더 좋다.
나는 무더운 여름이면 삼베적삼을 입고 돌아다니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러나 그것은 될 수 없는 일이다. 쌀쌀해지는 날씨에는 방울 달린 털모자를 쓰고 두터운 벙어리장갑을 챙겨 눈 내리기를 기다리고 싶다.
나는 연필을 좋아한다. 각이 진 연필, 둥근 연필, 진한 연필, 나의 책상 위에 놓인 많은 연필을 사랑한다. 진실한 얼굴을 편견 없이 바라보며, 남의 공적을 부러움 없이 찬양하는 것을 좋아한다. 여러 사람을 좋아하며 아무도 미워하지 아니하며, 몇몇 사람을 끔찍이 사랑하며 살고 싶다. 그리고 나는 점잖게 늙어 가고 싶다. 많은 시간이 지나고 혼자가 되면 아내와 함께 했던 여행을 추억하며 눈 내리는 모락산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싶다.
피천득의 "나의 사랑하는 생활"을 다시 읽어보며 나의 사랑하는 생활에 대해 썼습니다. 원문의 문장을 그대로 차용한 부분은 굵게, 그리고 밑줄로 표시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