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앞에 벽이 서있다. 바로 내 눈앞에 말이다. 그리고 무슨 일인지 내가 덮고 있던 이불은 어디 가고 나는 좁은 상자 같은 곳에 갇혀있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 평소처럼 창밖에서 떠 드는 소리 차가 지나가는 소리 배달부의 오토바이 소리 생선을 파는 아저씨의 우렁찬 목소리. 모든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게다가 내 가 갇힌 상자는 매우 좁아서 다리를 구부릴 수도 없고 팔을 움직일 수도 없다. 나는 오직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 수밖에 없고 발가락을 꼼지락거린다거나 눈알을 굴린다거나 코를 벌름거린다거나 하품을 한다거나 하는 정도의 일밖에 전혀 할 수가 없는 상황에 쳐해져 있다 비록 눈은 앞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앞엔 상자의 벽인고로 그저 흰색의 벽을 보는 것이 내가 볼 수 있는 전부였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고 완전히 고립된 상태인 것이다.
나는 소리를 질러 보기도 하고 발로 상자를 쳐보기도 하고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보려고 노력도 해 보았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는지 조차 인식할 수가 없다. 나는 가만히 생각에 잠긴다.
여러 가지 상념들이 머릿속에서 돌아다닌다. 어제저녁에 먹다만 피자의 모양과 그때 나누었던 김군과의 대화. 냉장고에 아침에 먹으려고 했던 초코우유, 이번 주말에 그녀와 함께 보러 갈 영화 티켓이 생각났다. 아직 주머니 에그대로 있으리라 생각된다. 지금 나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상태에서 어떤 상자 속에 갇혀있기 때문에 확인할 수는 없지만 아마 그대로 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시골집에서 힘겹게 농사를 지으시는 어머니, 어머니를 도와 성실하게 사는 고등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한 동생. 어머니와 동생에 대한 생각에 조금은 우울해진다. 어머니는 내가 대학을 나와서 번듯한 회사에 취직을 하여 남부럽지 않게 사는 것이 당신의 소망이셨다. 그 소망이 반정 도는 이루어졌다고 봐도 무방하지만 지금 이렇게 상자에 갇혀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그리고 동생. 물론 동생 스스로가 하기 싫은 공부를 때려치우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가정의 경제적 여건도 한몫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쯤 어머니와 동생은 벌써 일어나서 들에 나가서 일을 하고 있겠지… 그리고 또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회사에 남겨두고 온 중요한 문서가 담긴 디스켓과 나를 볼 때마다 넥타이를 점잖게 매고 다니라는 옆 부서의 최 과장님의 장난스러운 얼굴 표정. 매일 밤 나의 전화를 기다리는 그녀.
그녀의 생각을 해본다. 그녀는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아이들과 함께 하는 것이 잘 어울리는 귀여운 얼굴의 소유자다. 우리는 대학 때 동아리에서 만났다. 그냥… 보통 대학생들처럼… 자주 마주침으로 해서 정이 들어 사귀게 된 케이스다. 그녀는 당당히 교사 시험에 합격하였고 나도 당당히 취직시험에 합격을 했다. 우리는 돈을 좀 더 모아서 결혼까지 하려는 단계에 까지 왔다. 그런데…. 나는 이렇게 알 수 없는 상자에 갇혀버렸다. 어떻게 해서든 여기를 나가야 한다. 회사에도 가봐야 하고 어머니에게 안부전화도 드려아하고, 그녀에게 전화도 걸어서 아침인사도 해야 하고.. 무엇보다 지금 너무 배가 고파 뭔가를 먹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다. 그리고 화장실에도 가야 한다.
과연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알 수가 없다. 지금 내가 누워있는 것인지 서있는 것인지조차 분간이 안 가는 상황이다. 만약 서있는 것이라면 허리에 하중이 가해지고 누워있는 경우라면 등과 꼬리뼈, 발꿈치 쪽에 하중이 가해짐을 느끼는 것이 정상이나… 도통 느껴지지가 않는다.
이 상자는 보기에는 딱딱해 보이지만 의외로 부드러운 듯했다. 정말 이 곳이 우리 집인 지조 차도 불분명한 상황이다. 나는 또 생각에 잠긴다. 꽤 오래전에 읽은 쇼팬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에 세계에 관하여’에 관한 생각과. 중학교 때 만났던 어느 소녀의 기억과 친하게 지내던 고등학교 때의 친구들… 그리고 초등학교 때 로거 슬러 올라가 보기도 하다가.. 최근에 유행하는 가요를 흥얼대기도 해본다. 그리고 얼마 전에 본 액션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려보기도 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것밖에 없다.
서서히 졸려온다. 여러 가지 장면들이 스쳐 지나간다. 어디선가 본듯한 남자의 얼굴이 스쳐 지나가기도 하고… 영화 속의 여주인공의 대사가 스쳐 지나가기도 하고 책에서 본 휘어진 의자가 그려진 그림과 공중에 떠 있는 책상들…. 정신이 점점 몽롱해지고 나는 잠이 들어버린다. 꿈인지 생각인지 아니면 내가 실제로 무언가를 보고 있는 것인지 경계가 모호한 상태로 들어가 버렸다. 그곳에는 모든 것이 있었고 또 아무것도 없었다. 나 자신도 없었다.
아니… 나 자신이 없었다라기보다. 그것이 나인지 아니면 다른 것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것이 정말 나를 형상화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누군가를 형상화한 것인지 아니면 진짜로 존재하는 것인지 존재하지 않는 것을 내 상상으로 만들어낸 것인지 알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이것이 꿈인 지내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지금 내가 갇힌 상자 속에서 나는 또 한 번 갇혀버렸다. 나 자신의 의식 속에 갇혀버린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 탈출해야 한다. 어떻게 해서든 꿈을 깨 야하고 상자를 박차고 현실로 나와야 한다. 하지만 나는 꿈속에서 길을 잃어버렸다. 어떻게 하면 이 꿈에서 깨어나야 할지를 몰라 꿈속의 여기저기를 헤매고 있다. 어떨 때는 누군가에게 마구 쫓기고… 또 어떤 때는 높은 곳에서 누군가를 밀어내기도 하고 전쟁을 하기도 하고 모르는 여자와 사랑을 나누다가는 갑자기 숲 속의 호수 밑으로 가라앉기도 하고… 무언가를 잔뜩 먹고 나서 그 행복감에 젖어있기도 했다. 이제는 꿈에서 깰 수 있는 방법도 나는 찾아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이었는지…모든 것이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꿈속에 등장하는 물체들과 인물들의 형상이 희미해지더니 안개처럼 뿌옇게 변했다. 그리고는 안개가 자욱한 강물이 나타났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 만나는 그 강물 속으로 한발 한발 발을 내디뎌 들어가고 있었다. 숨이 막혔지만 내발을 내가 통제할 수 없었다. 나는 계속 강물 속을 들어갔다. 더 이상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으며 더 이상 숨도 쉴 수가 없었음을 느끼며 나는 다른 세상으로 전이해 간다. 그리고 ‘나’ 란 존재는 더 이상 이 세상에도 또 저쪽에 새로운 세상에도 존재하지 않게 된다.
그럼…
지금 여기에 있는 ‘나’는 도대체 누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