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초단편

비가 온다. 1

어느 여름밤의 기록

by Anarchist

저 먼 하늘에 검은 구름이 몰려온다.

그는 집에 있다.

누굴 만날 약속도 없다.

어디선가 전화도 오지 않는다.

하늘의 검은 구름이 점차 가까워진다. 그러더니 갑자기 번쩍.....

조금 뒤에 커다란 천둥소리가 들린다. 하지만 아직 비는 오지 않는다.

그리고 조금 뒤에 다시 하늘이 번쩍인다. 이번엔 요란한 소리와 함께 거센 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베란다에 놓인 화분들을 정리하고 문을 잠가둔다.

아까 켜둔 TV는 혼자 무슨 소리인지 모르게 지껄이고 있다. 밖에 천둥번개가 친다고 해서 끌 필요는 없는듯하다. 하지만 그는 하늘의 번쩍거림과 거대한 소음 소리를 좀 더 즐기기 위해 볼륨을 줄였다. 오직 빗소리와 천둥소리만이 이 방안에 가득하다.

먹다 남은 과자 부스러기와 부엌에 남겨둔 설거지하지 않은 그릇들. 모든 것이 귀찮다. 그리고 시끄러운 가운데의 고요함이 이 시간과 공간을 덮고 있다.

그는 바닥에 벌렁 드러누워서 지나간 시간을 회상한다.




중고등학교 시절의 같은 반 친구들. 그리고 과학선생님과 영어 선생님 음악 선생님, 통학시간 버스에서 만났던 어느 예쁜 여학생의 얼굴. 그리고 사촌 여동생과 만들었던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의 아름다운 추억. 결혼을 해서 애까지 있는 초등학교 때의 짝사랑, 얼마 전에 잃은 맘에 들지 않았던 직장, 친구들과 영화 보러 갔던 날. 과속운전으로 경찰에게 붙잡혔던 일.

빗방울 한 방울 한 방울이 그의 과거를 가지고 떨어지고 있는 것만 같다 그리고 그 과거들이 작은 소용돌이를 만들면서 더러운 하수구로 흘러내려간다.

다시 그 빗방울이 떨어진 그 모양대로 하늘로 올라가는 일은 있을 수 없다.


과연 이제 그에게 남아있는 미래는 무엇일까?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어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