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의 상징 타지마할. 솔직히 별로 관심은 없었다. 난 청개구리 여행자라 남이 다 가는 곳 그리고 다 아는 곳은 가기가 싫었다. 그래도 아마 이것이 여행의 묘미가 아닐까. 계획없이 배낭 메고 떠나는 그 곳에 항상 길이 있는 것 같다.
인도에 도착한 그 다음날 어떻게 하다 보니 타지마할이 있는 아그라로 가게 되었다. 어제 처음 호텔빠얄에서 만나 어젯밤 같이 한잔하다 갑자기 타지마할 동행자가 되어 버린 야스와 섀런과 함께 아침 일찍 일어나 분주하게 준비하고 숙소 앞에 지나다니는 릭샤를 잡아타고 올드델리 역으로 달렸다. 빠하르간지 바로 앞의 뉴델리 역에서 가는 것보다 좀 멀리 있지만 티켓이 더 싸고 이용자가 적어 당일날 아침에도 티켓을 구할 수 있다는 정보를 얻었기 때문이다.
인도의 아침은 회색 빛깔이었던거 같다. 인도의 수도 델리답게 먼지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눈부신 햇살과 아침 특유의 밝음은 덜 했던 거 같다. 그러나 분주함과 활기찬 그 모습은 지금까지 갔던 다른 어느 도시들보다 더 했던 거 같다. 그래도 릭샤를 타고 맞는 아침 특유의 산뜻한 바람은 만국공통인가보다.
올드델리 역으로 가서 다행히 몇 장 남지 않은 기차표를 샀다. 아침 8시 좀 넘어 출발해서 점심 때쯤 아그라역에 도착했으니 4시간 좀 넘게 걸린 거 같다. 처음탄 인도의 기차. 사진에서만 봤던 인도의 기차는 너무 매력적이다. 때가 빼곡이 쌓인 듯한 옅은 군청색으로 된 열차칸에 쉴새없이 돌아 다니는 아이스커피와 짜이를 파는 장사꾼들. 외국인을 쳐다보는 너무 선명한 인도인들의 그 눈망울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바라보며 열차와 열차 사이에 앉아 다리를 밖으로 내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 너무 멋지다. 인도다.
기차안에서의 4시간은 단 한순간도 지루할 틈이 없었다. 이렇다 할 다이나믹한 순간은 없었지만 인도 기차 안에서 느끼는 인도 그 자체가 아름다움이었다.
아그라역에 도착했다. 점심때 도착해서 그런지 푹푹 찌는 더위에 일단 짜이 한잔을 마시며 여유를 찾기로 했다. 역밖으로 나가니 수많은 릭샤왈라들이 말을 걸어 온다. 여행을 처음 나온 야스를 제외한 나와 섀런은 이런거에 익숙했다. 우리 둘은 아무런 말도 없이 각자 흩어져 몇몇의 릭샤왈라들과 가격 흥정을 시작했다. 정확한 물가는 우리도 모르지만 다들 터무니 없는 가격들을 제시해온다. 그 중 하나의 솔깃한 제안. 역에서 아그라에서 몇 가지 관광지들을 다 구경시켜주고 다시 역까지 데려다 주는 것까지 다해서 한 사람당 150루피를 제안한다. 나쁘지 않은 제안이다. 웃으며 우리 셋은 릭샤에 올라탔다.
바람을 가르며 20분 정도 가서 처음 도착한 곳은 타지마할 남문. 가는 동안 기사 아저씨는 지금까지의 손님들이 쓴 방명록을 보여주면서 신나했다. 한국어, 일본어 심지어 이스라엘인인 섀런을 위한 히브루어까지 있었다. 아저씨가 말하고 싶은 것은 나는 믿을만한 사람이다. 나는 사기꾼이 아니다 였던 거 같다.
인도인의 10배의 입장료를 내고 입장한 타지마할. 한걸음 한걸음씩 문을 통과하면서 갑자기 저 멀리 눈부시게 하얀 집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도 뭔지는 잘 모르겠다. 뭔가 가슴이 벅차 올랐다. 사실 그냥 하얀색 건물이다. 책에서 본 사진과 다른 것은 하나도 없다. 아마도 이런 진한 색의 나라에 홀로 외롭게 하얗게 서 있는 저 건물이 안쓰러웠는지도 모르겠다.
찌는듯한 더위에 힘들어진 우리는 일단 뭐 좀 먹기로 했다. 남문 앞에는 많은 식당과 숙소들이 있었다. 전망이 좋아보이는 한 식당으로 들어갔다. 한국인 관광객이 많은지 입구에는 한글로 메뉴들이 써져 있었다. 3층의 옥상으로 올라갔다. 저 멀리 흐릿흐릿하게 타지마할이 보였다. 외국에 오면 한국음식은 쳐다보지도 않는데 이상하게 한국음식이 땡겨 신라면을 시켰다. 좀 이색적이지만 타지마할을 바라보며 땀을 뻘뻘 흘리며 먹는 신라면은 정말 기가 막혔다.
다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릭샤를 타고 레드포트로 갔다. 타지마할과는 전혀 다른 느낌의 이 성. 멋진 사진을 많이 찍었지만 이미 더위와 걷기에 지친 우리는 얼른 쉬고 싶어 릭샤 아저씨와 만나기로 한 장소로 먼저 가 있기로 했다. 델리행 기차 마지막 시간까지 한 두시간 남아서 기차 타기전 얼른 시원한 에어컨이 있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그러나 아저씨는 약속 장소에서 기다린지 삼십분이 넘도록 나타나지 않았다. 땡볕에 앉아 담배만 뻐끔뻐끔 피다 섀런이 말한다.
“그냥 아무 릭샤나 타고 가자”
당황한 야스와 나는
“근데 우리 아직 그 아저씨한테 돈 안 냈잖아”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섀런은
“몰라 아저씨가 안 오잖아. 그 사람 잘못이야. 덥다 얼른 가자”
그렇게 우리는 근처에 있는 아무 릭샤나 잡아타고 무작정 말했다.
“에어컨이 있는 카페로 가주세요. 빨리 가주세요. 우리 죽을 것 같애요”
부랴부랴 달려간 에어컨이 있는 깨끗한 카페. 인도에도 이런 곳이 있구나 하며 놀랐다. 비쌌지만 시원한 아이스 레몬에이드를 한번에 들이켰다. 다시 릭샤를 타고 아그라역으로 갔다. 마지막 기차라 그런지 엄청나게 긴 줄이 있었다. 외국인 전용 창구도 예외는 아니였다. 이러다 기차표 못끊어서 여기서 자고 가야하는건 아닌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우리 셋은 각자 다른 줄에 서서 기다리다 제일 먼저 줄이 없어지는 곳에서 델리행 기차표를 세 장 끊기로 했다. 갑자기 섀런이 자기 줄에서 이탈하더니 맨 앞으로 간다. 창구에 가서 뭐라고 얘기하더니 갑자기 웃으며 기차표 세 장을 가지고 온다. 황당했다. 어떻게 된거냐고 물으니 섀런은
“그냥 웃으면서 빨리 델리 가야한다고 말했어. 그러니까 기차표 주던데?”
미인계다. 섀런은 여신이다. 미인계는 전 세계에서 다 통하나보다. 플랫폼에 나란히 앉아 짜이 한잔씩 마시며 기차를 기다렸다. 한시간 정도 기다렸던거 같다. 드디어 기차가 온다. 기차를 타려고 하니 갑자기 인도인 남자가 오더니 버럭 화를 내며 뭐라 말하며 섀런한테 전화기를 얼굴에 갖다댄다. 섀런은 틱틱 거리며 전화 받으라는 손을 밀치고 기차로 들어갔다. 나랑 야스한테도 전화를 받아보라고 화를 냈지만 우리도 그냥 무시하고 기차를 탔다. 야스가 도대체 저 사람 뭐라고 하는거냐고 묻는다.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못알아 들었단다. 사실 나는 알아 들었다. 그 아저씨는 분명 이렇게 말했다.
“너네들 아까 릭샤타고 돈 안내고 튀었지? 전화 받아봐 그 릭샤 기사다. 너희 경찰서 좀 가야겠다”
나는 순간 쫄았지만 섀런의 너무 당당한 태도에 그냥 따라 기차를 탄 것이다. 기차를 타고 난 후에도 그 인도인
남자는 창문으로 계속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기차가 출발하고 분명히 영어를 알아들었을 섀런에게 물었다.
“너는 왜 그냥 무시하고 지나간거야?”
섀런은 담담히 말했다.
“인도인이 그냥 와서 우리에게 헛소리 하겠지 하고 무슨 말인지 듣지도 않았어”
섀런은 대단한 아이다. 정말 인도에 있을 만큼 있은 거 같다. 반면에 야스는 델리로 가는 4시간 넘게 잠도 못자고 계속 나한테 말했다.
“델리 도착했는데 경찰이 우리 기다리고 있으면 어떡하죠? 아까 그 남자 기차에 탄 건 아니겠죠? 저기 저 사람 이상해요 자꾸 우리를 힐끔힐끔 쳐다봐요. 그 릭샤 아저씨랑 아는 사람은 아니겠죠?”
그럴리 없다고 말하고 나는 피곤해서 눈을 붙였다. 야스는 불안한지 한숨도 못잤다. 델리역에 도착을 했고 역시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숙소에 도착한 우리는 담배 하나씩 물고 오늘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하기 시작했다. 섀런은 시크하게 웃으며 말한다.
“맨날 인도인들한테 여행자들이 당하는데 우리도 이런 거 한번씩은 해야지 않겠어?”
뭔가 잘못됐으면서 묘하게 설득적인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