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윈
여행이 아닌 이곳에서의 삶은 일상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딱히 사진도 찍지 않는다. 집에 있다가 집 사진을 찍지 않는 것과 똑같다. 특별하지 않다. 그래서 매일 살고 있지만 이따금씩 살아 있음을 느낀다.
기선이도 하우스키퍼 일을 하며 이 삶에 익숙해져 가는 것 같다. 하루는 집에 갔는데 침대 위에 낯선 반바지가 있다. 누가 잘못 내 자리에 놔뒀나 싶어 기선이에게 물어봤다.
“이 바지 누구껀 줄 알아? 내 침대 위에 있던데”
“훗 한번 입어봐라”
기선이는 나에게 조리를 선물 받고 자기도 일을 해서 꼭 나에게 뭔가 사주고 싶어 했던 거다.
“첫 주급 받아서 하나 샀다. 옷가게 가서 요즘 제일 잘 나가는 거 추천해 달라고 하니까 직원이 이거 추천해주더라. 한번 입어봐라”
입어보니 딱이다. 옅은 네이비색 바탕에 밑단에는 흰색으로 디테일이 들어가 있다. 생각지도 않은 감동이다. 아직 돈도 많이 없을 텐데 뭘 이런 거까지 사주나.
셰어하우스에 들어간지 조금 시간이 흐르니 셰어메이트들과 다 친해졌다. 처음에는 12명이서 어떻게 사나 싶었는데 다들 일하는 시간도 다르고 각자 일정이 있어서 매일 집이 바글바글하지는 않았다.
거기서 제일 친해진 대만친구들. 처음에 우리를 여기로 데리고 와줬던 제이미, 레이첼 그리고 앨빈. 셋 다 우리보다 딱 두 살 많아 제이미 누나, 레이첼 누나 그리고 앨빈 형이라고 불렀다. 누나들은 계속 거기 백패커스에서 청소 일을 하고 형은 공사현장에서 일하는 것 같았다. 맨날 무거운 거 든단다. 시급도 좋고. 여기 사는 남자들 중에 제일 얼굴도 하얗고 말랐는데 어떻게 일 하나 싶다.
누나들은 우리가 처음에 돈도 없고 요리도 잘 못하는 게 안쓰러웠나 보다. 한번씩 요리를 해서 우리에게 챙겨준다.
“넬리. 아침 먹고 가! 또 빵 쪼가리나 라면 같은 거 끓여먹지 말고”
나는 나에게 밥 주는 사람에게 충성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게 누나들과는 급속도로 친해졌다.
한번씩 큰 마트에도 파는 신라면을 끓여먹는데 자기들도 신라면을 좋아한단다. 우리는 라면에 계란 하나 파 조금 넣어 먹으면 잘 해 먹은거다. 그러나 누나들은 달랐다. 야채를 씻고 도마를 펴더니 송송송 썰기 시작한다. 라면을 끓이고 그 야채들을 다 넣더니 다 됐다고 한번 먹어보란다.
라면에는 숙주와 브로콜리와 토마토까지 들어있다. 충격적인 비쥬얼이라 안먹으려다 맛만 봤는데 야채들이 신라면의 매운맛을 잡아주고 시원한 국물맛을 낸다.
“이건 대만 스타일이야. 우리는 라면에 토마토를 넣어먹어”
이렇게 한번씩 토마토 라면도 끓여주고 청소 일하면서 손님들이 분실하거나 버린깨끗한 옷들도 한번씩 주워다 주었다.
우리 12명은 당번을 정해서 청소를 했다. 사람이 많으니 돌아가며 한달에 2번 정도 많으면 3번 청소를 했다. 청소하는 거는 쉽다. 각자 방은 각자가 청소 하는 걸로 하고 거실은 청소기로 밀고 화장실도 대충 물 뿌리고 슥슥 닦으면 끝이다. 그리고 우리 집에는 청소 일을 하는 사람이 누나들 말고도 세 명이나 더 있다. 청소 전문가 들이다. 그래서 집은 항상 깨끗하다.
제일 신기한 것은 12명이 사는데 집에 세탁기가 하나 밖에 없다. 그런데 아무런 불편함 없이 집은 잘 돌아간다. 빨래 하고 싶을 때 못한 적이 한번도 없다. 이 더운 날씨에 다들 빨래가 많아서 밀릴만도 한데 한번도 그런적은 없다. 그리고 베란다는 그렇게 넓지 않은데 문제 없이 12명의 빨래를 다 널 수 있다.
기선이는 시간을 얼마 안주는 하우스키퍼 일을 하다 빨래 공장에 자리가 나서 일을 옮겨서 한참을 일하고 오기 시작했다. 점점 돈이 모인다. 나도 평일에 식당에서 주말 밤에 바에서 일하며 점점 안정되어 간다.
이제 운동만 하면 완벽하다. 일하는 곳 근처에 헬스장이 있는 것 같다. 내일 한번 가봐야겠다. 운동하면 몸은 잠깐 힘들지 모르겠지만 아드레날린 때문에 성격도 밝아지고 활기차지는 거 같다. 맨날 라면 먹어서 형태가 많이 사라진 복근도 다시 보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