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라카
숙소를 찾아 다니느라 너무 더워서 에어컨을 빵빵하게 틀어놓고 잠깐 잤더니 감기에 걸렸나 보다. 콧물이 멈추질 않는다. 동남아 여행하면서 처음 아파본다. 원래 건강한 체질이라 한국에서도 감기는 1년에 한번 걸릴까 말까였는데 여행까지 와서 감기라니. 거기다 이 더운 나라에서 감기라니. 콧물이 너무 흘러 아예 콧구멍에 휴지를 꽂고 돌아다녔다.
말라카에는 김형말고도 또다른 인연이 있었다. 타카상이다. 일본 유명방송국에서 잘나가는 회사원이었다가 그만 두고 모은 돈으로 세계일주를 나왔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은 조용하고 분위기 있는 이 도시 말라카에서 장기체류 중이란다. 말라카에는 생각보다 장기체류자들이 많았다. 굳이 다른 동남아보다 비싼 이곳에서 왜 이렇게 오래 머무나 했지만 그 이유를 깨닫기에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이 숙소는 장기 체류자들이 잘 쉴 수 있게 만들어져 있다. 여행자들이 같이 어울리며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넓은 거실이 있고 크진 않지만 키친이 있었다. 거기에는 냉장고가 있어 장을 봐와서 마음껏 요리를 해먹을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여기서 타카상은 요리를 직접 해먹으며 식비를 아껴가며 푹 쉬면서 영어공부도 하고 여행을 즐기고 있었다.
타카상과 친해진 우리에게 오늘은 요리를 대접하고 싶단다. 거창한 건 아니지만 일본식 소고기 덮밥을 만든다고 해서 내가 도울 것 없냐고 물으니 한참 사양하더니 그럼 타카상이 야채랑 고기를 자를 테니 나보고는 고기가 안타게 고기를 잘 볶아 달라고 하신다. 길 찾는 것 다음으로 내가 세상에서 가장 못하는 요리를 좀 도와드리고 행복한 식사를 대접받았다.
밥을 먹고 밖으로 나가봤다. 숙소에서 조금만 걸어가면 큰 몰이 있다. 원래 백화점이던 몰이던 별로 안 좋아하지만 걸어다니기 너무 더워 땀을 식히러 들어갔다. 역시 어마어마한 에어컨 바람이 나를 맞아준다. 쿠알라룸푸르에서 너무 반짝반짝하고 럭셔리한 몰에 놀랐지만 여기는 그래도 동남아 몰 같은 느낌이 들었다. 헝클어진 머리와 허름한 옷을 입고 돌아다녀도 그렇게 부끄럽다는 생각이 안 들었으니깐.
또 이렇게 평범하지만 즐거운 하루가 갔다.
그리고 다음날.
말라카 대표적 관광지인 올드타운을 가봤다. 옛날 항구도시로 번창했던 이 도시는 포르투갈과 네덜란드 풍의 건물들이 아주 잘 남아있었다. 그걸 인정받아 이 도시 전체가 UNESCO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조금 더 역사를 공부해왔었으면 더 크게 와 닿았었겠지만 이 도시는 충분히 너무 아름답다. 그리고 길을 따라 계속 걸어가니 어제 숙소를 한참 찾아보던 차이나타운이 나온다. 어제 그렇게 덥고 짜증나던 이곳이 이국적이고 멋지게 보인다. 역시 상황이 그때의 기분을 만드나 보다.
숙소로 돌아가서 조금 쉬다 강을 따라 야경을 보러 가기로 했다. 타카상에게 물어 정보를 얻어 버스를 타고 보트투어 선착장으로 가서 보트를 탔다.
강을 따라 옆으로 주욱 늘어서 있는 반짝반짝 하는 집들이 너무 아름답다. 말라카는 낮에도 멋지지만 밤에는 또 다른 아름다움으로 감동시킨다. 보트를 타고 강을 따라 천천히 내려가는 내내 ‘우와’ 하는 탄성만 질렀다. 눈물이 나올뻔한 멋진 야경 투어를 마치고 빛을 반사하며 여러가지 색깔로 출렁이는 강을 바라보며 한적한 바에 자리를 잡고 앉아 맥주도 한잔했다.
이렇게 내 마음대로 동남아에서 가장 예쁜 도시 TOP 3를 완성했다. 순서에 관계없이
1. 라오스 루앙프라방
2. 베트남 호이안
3. 말레이시아 말라카
말라카에서 장기체류 하는 이유는 딱히 없다. 말라카니깐. 이 도시니깐. 시간이 좀 더 있었다면 나도 여기에 자리를 잡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