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드코스트
호주에 온지 벌써 5개월이 넘어가면서 조금씩 삶에 지쳐가는 듯하다. 처음에는 일이 없어서. 그래서 일이 너무 하고 싶어서 발버둥 쳤지만 이제 빚도 다 갚고 돈도 조금씩 모이기 시작하면서 일과 집뿐만이 아닌 다른 삶을 살고 싶은 욕망이 커질 때 즈음이었다.
사실 일상은 평범해서 더 행복했었다. 호주에서 단 돈 8만원 들고 아는 사람 하나 없이 일자리도 없이 시작했지만 지금은 매일 할 일이 있고 일 마치고 집에 오면 같이 밥을 먹을 가족이 생기고 가끔씩 같이 바람도 쐬고 맥주도 한잔씩하고 부족한 게 없었다. 데이오프 날이나 일을 일찍 마칠 때는 온 가족이 모여 게임을 했다.
좀 유행이 지난 게임이긴 했지만 각자 노트북을 가지고 호주 생활 하는 우리에겐 피시방에 따로 갈 필요 없이 집에 옹기종기 모여 게임을 하는 게 너무 즐거웠다. 우리가 거의 매일같이 일을 마치고 집에 얼른 가고 싶게 만드는 게임은 ‘카오스’ 라는 게임이다. 블리자드에서 만든 워크래프트라는 게임의 한 종류였다. 게임 방식은 간단해서 남녀노소 예솔이 소라형 그리고 현아까지 즐길 수 있는 게임이었다.
대부분 나랑 예솔이랑 한편, 소라형이랑 현아랑 한편 이렇게 2:2로 게임을 했다. 왜 커플인 소라형이랑 예솔이랑 한편이 아니라고 묻는다면 이렇게 말하고 싶다.
“커플이 한편을 하게 되면 지면 꼭 싸워”
게임이 아니라도 직설적인 성격인 소라형 덕분에 같은 집에 살면서 자주 둘이 싸우는 걸 본다. 그럴 때마다 거실에 사는 나는 한 공간에서 싸워도 도망갈 곳이 없어 투명인간이 되곤 한다. 아니면 거실에 있는 가구인양 가만히 내 할 일을 한다. 매일매일 게임을 너무 열심히 해서 현아는 코피가 터지고 나는 한동안 맨날 술 마신 사람처럼 눈이 빨갛게 살았다.
그리고 혼자 쉬는날 집에 아무도 없을 땐 기가 막힌 뷰의 창가에 누워 하루종일 드라마를 다운 받아 보거나 페이스북으로 친구들과 연락을 한다. 주방에 하루종일 서서 일하는 일에 적응될 법도 한데 일이 없는 날엔 정말 최대한 아무것도 안하고 누워있으려 노력한다. 소파에 누웠다 침대에 누웠다 괜히 베란다에서 담배 하나 피웠다 하며 말 그대로 쉬는 날을 최대한 만끽하려 노력한다.
그래도 나는 여행자다. 호주에 와서 한 곳에 정착해서 살 마음은 없었다. 짐도 45리터짜리 배낭에 내 1년의 삶을 넣고 왔다. 이 생활이 익숙해 질 때쯤 나는 떠나기로 결심했다. 이곳에서 최대한 멀리 떠나기로 했다. 여기와서 사람들에게 많이 들은 서호주의 ‘퍼스’
퍼스에서 조금 밑으로 가면 포도 농장이 있을 거라고 한다. 호주에 몇 년 살며 농장이라는 농장은 다 돌아본 소라형이 말한다.
“퍼스 밑에 마가렛리버라는데서 포도 따다가 별로면 거기서 서쪽을 따라 주욱 올라가면 딸기 농장도 있고 제랄톤이라는 곳에 가면 랍스터 공장도 있고 일자리는 많을 꺼야. 그리고 서호주가 제일 이뻐”
그리고 카타르에서 만난 내 소울 메이트 기선이. 기선이에게 같이 호주로 가자고 했지만 계속 미루다 비행기 값만 벌어서 호주로 온다고 한 게 벌써 반년. 생각보다 돈이 안모이나 보다 하고 기다리다 이제 나도 돈이 조금 생겼으니 진짜 비행기 값이 있으면 얼른 호주로 오라고 했다. 일단 내 돈으로 같이 쓰다 조금씩 돈 모이면 갚으라고 하고 더 늦게 전에 오라고 하니 진짜 비행기표만 끊고 온단다.
그래. 퍼스로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