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先生 .2

사각공간 - 시간, 공간, 인간, 행간

by 사각공간

'선생' 관련 사족일지언정 덧붙여 본다.




공무公務는 물론이거니와 민간 영역에서의 사무事務(책상물림 화이트칼라 담당으로 국한된 개념이 아니라 말 그대로 일, 포괄)를 담당하는 입장에서 민원인을 비롯한 객客을 가리키는 호칭으로 '선생'은 범용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지 싶다. 짐작컨대 예우도 예우지만 상호 간 거리 확인 및 확보가 주된 목적으로 부상하면서 더 널리 쓰이는 게 아닐지. 실상 조금씩 의미를 달리 하며 짝하게 되었겠지만. 호칭으로 너/나 구별 짓는 경계로 갈음하는 것이야 특기할 만한 건 아니다(차라리 보편일 듯). 서로 간 어느 편에서든 무례無禮가 들어설 여지를 두지 않으려는 의도로 읽는 편이 적당하지 싶고. 나이나 지위로 스스로를 돋우어 펼치는 방약무인傍若無人 비일비재인 현장을 떠올리면 안쓰러울 지경의 미봉책. 하대下待와 경멸로 표출되는 불손을 차단, 상처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장치로는 '최소한'에 해당할 테니. 하지만 이조차 묵계로 상호 간 전제하는 한에서 비로소 작동. 그러나 아니 그래서 또 조금씩 어긋남으로 마주하니 현실이다.


그런데 이렇게 치이는 한편에서, 명명은 '선생'이지만 하대와 경멸을 노골적으로 내비치는 경우 또한 적지 않은 듯싶다. 꼭 갑질로만 드러나는 게 아니란 얘기. 외려 약자의 명찰을 전면에 달고서, 무리 지은 집단의 이기에 기대어 폭력을 행사하고 이를 감추기도 하니까.


물론 무례 그러니까 소위 갑甲질 임을 인식하면서도, 잘못이자 그릇된 행위인 줄 알고 느끼면서 무소불위 행사 서슴지 않던 시절이 존재했고, 그 세월 대응 못하고 감정노동만 연속하던 을乙이 입은 상처는 깊다. 그래서 분화된 개별자로는 미약할 수밖에 없던 떨림, 연대 통해 겨우 소리의 형체를 갖추니 비로소 조명되어 마침내 처우/처지 개선 촉구하는 목소리로 하나 되기에 이르기도 하는 것. 그래서 노동자(이즈음은 특히 하청의 정규, 그리고 모든 비정규)는 물론이거니와 여성/장애인에 이르기까지 소수자의 '꿈틀거림'은 하나하나 모두 중하다.


이는 기旣 득得한 권權을 중심으로 뭉친 집단의 무뎌진 감각을 새롭게 벼리는 충격으로 기능하게 마련이니. 집단 내부에서 시작된 갱신/쇄신이 시원찮게 봉합되면 결국 파격破格으로, 터져서 기어코 전복 아니 극복되는 말하자면 이치랄까. 그런데 이 새로운 합合(내부에서 발한 자성 촉구이든 외부에서의 충격이든) 곧 자기 이전의 기성을 대체, 격格으로 자리한다. 당연하다. 격으로 자리하여 정正으로 작동하니 곧 기성화旣成化. 불가분이요, 이렇게 굳는 것도 자연스럽다. 다만 자연의 일부로 여기는가, 자신만은 계속해서 예외로 자리하리라는 헛된 믿음을 맹목하느냐에서 차이는 발견 아니 목격된달지. '반反'의 등장과 함께 새로운 합을 잉태/출산하기까지, 이 도출 과정 자체를 자연스러운 이치로 여긴다면, 그러니까 지속 가능한 실체란 '영구적 변증'이라는 flow로 가늠될 뿐임을 인지. 이게 중하다는 것. 이를테면 페미니즘을 비롯한 등등의 -ism 또한 휴머니즘으로 계속해서 극복되어야 할 대상으로 자각하고 있음을 뜻한다고 할 수도 있겠다. 따라서 얼마간 거리 두는 객관에의 포진은 필수불가결.


문제를 초래하는 건 이 거리 두기에 실패하는 경우. -ism에 안주하니 자가당착 불가피. 해서 자기 정체성마저 함몰되는 형국으로 진영陳營이라는 가상의 공동체에 부화뇌동, 꼭두각시 춤사위나 펼치는 형세로 드러나는 것. '내로남불'과 같은 표현이 시쳇말로 회자 되면서도 사그라들지 않는 이유라면, 이런 꼭두각시놀음의 만연 때문이지 않을까. 복지부동을 카모플라주 하는 따위..




선생先生, '거듭남'을 가능한 대로 지속하는 움직임이야말로 being의 실체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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