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각공간 - 시간, 공간, 인간, 행간
'선생先生'이라는 표현이 존칭尊稱으로 통용通用 되기까지의 사정이라면, 누구든 어렵지 않게 짐작하겠다(사전적 정의를 유일무이 잣대로 세우려 든다면, 또 그에 부합하지 않으니 죄다 틀렸노라 빨간 펜 긋겠다면 말리진 않으련다. 알게 뭐란 말인가 ~ ~).
당초 저와 마주하고 있는 존재를 하나의 인격人格으로 상대하는 데서 이미 전제된 바가 존중尊重. 제 존엄尊嚴을 자긍自矜 함 같이 상대 역시 동등한 존재로 긍정肯定 함을 태도로 보이는 것. '선생先生'이란 호칭은, 이에 더하여 자신보다 '먼저 난[生] 자者'로 예우禮遇하는 것. 먼저 겪었으니 그로써 깨달은 바를 바탕으로, 아직 앎에 닿지 못한[無知] 자신의 처지處地를 밝혀줄 존재라 여기고 예로써 대하는 것. 때문에 교육자인 스승을 '선생'이라 부르고, 연장자年長者를 통칭하는 표현으로 자리하였을 것. 배경이라면 과거 인류와 문자가 '서로 사맛디 아니할' 적(구술 중심 경험 전례 체계라면 더더욱) 부족/씨족의 대표인 장長을 촌로村老가 점占할 수밖에 없던 사정도 자리했겠고. 임금의 어원을 '잇금'[이빨 자욱, 그러니까 디폴트 값이 연장자란 얘기]에서 찾는 것 또한 같은 궤 아닌지.
그러던 것이 사회상 변화─밖으로 부푸는 동시에 개개個個의 人으로 divided 핵분열 연속─에 발맞추며 흔히 쓰이니 무게를 잃은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겠다(다르게 표현하면, 과거 이어령 선생이 짚은 것처럼 '말에 거품이 끼인' 것일 테고).
사실 너도 나도 '선생'일 수 있는, 서로가 서로에게 '선생'의 면면으로 드러나는 사회야말로 오히려 지향해 마땅한 사회상이겠지만. 『논어論語』를 보면 공자 역시 이 '선생-되기'야말로 살아가는 동안 추구하며 실천할 바라고 강권하는 듯. 어디 공자뿐이랴. 그 테스형부터 성현이라 추앙하는 여러 인물이 인류에 남겨둔 메시지의 공통분모라면 '너 자신이라 여기지만 실상 모르는 것 투성이인 너라는 물건 알라는, 격물格物 치지致知 곧 자신이라고 여기는 물物을 의심하고 파고들어 그 격格을 매만지는 지경으로까지 네 앎[知]이 이르도록[致] 절!차!탁!마! 하라'는 것.
해서 나는, 여기에 예수의 입을 거쳐 사람에 전해진 '거듭남'을 의미로 새기자는 마음으로, 대하는 '님'의 연배가 어떠하든 간에 '선생'으로 예우하는 걸 기본으로 다지려 한 지 좀 됐다. 꼭 무슨 관官이라든지 하는 처지의 지위를 높인다고 그 앞에서 몸 낮추고 조아리는 시늉하는 게 아니란 얘기. 그렇게 생각하든 말든, 그리 여기고 그 꼴에 값한다고 갑질 등 행위 서슴지 않는다면야 그건 그이가 짓는 업業일 따름. 저지른 처사에 따르게 마련인 책임이야 어차피 그이의 몫이지, 내 사정은 아니니 말이다. 그리하면 그리하는 그대로 '반면교사'로 본을 자처함이니 '선생'이긴 매일반.
그러나 이를 태도로 굳히기란 얼마나 어려우냐. 딱히 추켜주려는 의도가 아님에도 거들먹거리는 순진무구라면 오히려 너그러이 받아, 넘기기 수월하다만. 물론 이 또한 그러한 모양새를 취한다는 우월감이 자리하기 때문이지만. 하여도 경멸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무시와 배제를 일삼아 교환하는 인간 군상은 역시 서글프다. 오해에서 비롯하였다 하더라도 까닭을 알면 그래도 이해 못할 건 아니지만. 그것도 아니면 상대 역시 의미를 새겨 이르던 '선생'을 철회하고 싶어지는 것. 이런 욕망에 지지 않고 햇살처럼 '다만 비칠 뿐' ← 이를 태도로 견지해야 하건만. 안 그래도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아서' 아, 어렵다 ~ 어려워 ~;;
카운트 되는 번호를 보면 알 수 있지만 오래 묵혔던 내용이다. 다듬으며 다시금 과거지사 떠올리니 심난하던 차, 서점 최애독자이신 박선생님 오셔서 함께 이야기 나누는 동안 엉킨 실 풀어 다시금 타래로 엮어볼 수 있었다. 이것 참 고맙습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