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규, 조개의 깊이
─ 책방 아저詩

사각공간 - 시간, 공간, 인간, 행간

by 사각공간

서점이라면 유통 말 그대로 통로 그러니까 지나는 단계로, 책을 둘러싸고 이는 활동이란 측면에서 살피면 중심 아닌 변방이겠고 안쪽 아닌 바깥(인싸 아닌 아싸)일 겁니다. 기술 진보, 시대 변화 등 이룬 21세기 초입, 이즈음의 온&오프 대형서점은 슈퍼을乙로서 이에 부합하는 인적 구성원들로 나름의 역할 분명히 하고 있으니 이를 무시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될 것임은 물론이겠죠. 다만 그처럼 규모의 경제를 이룬 서점이 계속해서 지향하는 바인 그 중심을 다 함께 열망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애를 쓴다고 될 일이 아니니 그렇다기보다 굳이 그리 옮겨 갈 필요도 없는 것이죠. 오히려 중심 향한 열망이라면 그를 받칠 원기가 충만한, 또 그 안에 들든 들지 못하든 과정 통해 겪는 경험을 자기 내면에 인프라로 구축함이 절실한, 젊은 세대의 몫. 단, 예외라면 이 몫에 대한 분배 형평을 실현할 장場 마련에 적합한 안목과 능력 그리고 실무 경험이 풍부한 그러니까 어른다운 어른이 주축 되어 펼치는 경우이겠습니다. 그런데 이런 허브hub 적 인격이 일 벌일 때는 딱히 기존의 중심을 향하지도 않을 것. 왜냐하면 당초 그 중심이 어디에서 비롯하여 형성되는지를 자~~알 알기 때문. 그러니 제 쪽의 필요나 편의를 위하는 게 아니라면 시대이든 세대이든 혹은 구분 없는 쌍방의 호명이 있을 것이고, 그 부름이 미약해 보이거나 말거나 받잡고 나름의 역할 감당하겠지요. 당초 그 뜻의 사이즈가, 시작 당시 비웃던 이들마저 품을 만큼 창대한 경우라면 더더욱. 아무튼 '때를 얻든 못 얻든' 기본기 충실히 다지는 데에 힘쓰는 건 공통분모. 따라서 소규모 점빵 본 아재 역시 제가 취급하는 재화에 대해 알고자 덤비는 걸 즐겨 함이 마땅. 생각다보니 그렇더란 얘기고요. 실은 책방에서 저 좋아 책 살피는 걸 괜히 일 열심히 하는 양 핑계 삼자고 짱구 굴리다 생산한? 잡설에 불과합니다. '_'




책방 아재로는 좀.. 투박하다면 투박하게 생긴 모양새이나 그래도 나름 시詩, 좋아하고 읽는 편입니다. 그렇다고 억지로 덤비진 않고요. 읽는 게 즐겁습니다. 이따금 들르시는 독자분 말씀 듣는 경우 심심찮은데 대개 어렵게 여기시더라고요. 그런데 누구나 다 그렇잖아요. 처음이면 낯선 게 당연하고 말이죠. 이건 어느 분야든 마찬가지.


암튼 그래서 책방 꾸려가는 한 사람으로서, 책 유통상 종사자 일원으로 책임을 느끼는 바 詩에 다가서고픈데 망설이게 되는 독자분, How To를 고민하는 분들 위해 딱히 Know How랄 것도 없는, 그저 詩에 다가가서 바라보는 책방 아재의 모습을 보여드리고팠습니다. 옮겨놓고 보니 '야, 너두' 느낌이네요 ^^;;




생각해보니 그렇더란 말입니다. 책으로 엮이고 묶인 내용이란 기실 저자(들) 자신이 마주한 세계(세계라 해서 꼭 5대양 6대주 만을 가리키는 게 아님은 저보다 더 잘 아시겠고요)를 이해한 방식에 한글 자모를 입혀 지면에 앉힌 것이잖아요. 내'가 활자를 읽음으로 해서, 지면에 박제 상태로 잠들어 있던 저자의 시선이 목소리를 얻어 읽는 이 내면으로 건너와 그 전신으로 울려 퍼지잖아요, 이를테면 말입니다.


그러니 독서는 사람 말을 끝까지 경청하는 훈련으로 제격인 데다 이만큼 경제적이고 효율적인 것도 없지요. 이런 효용으로만 따져도 詩는 으뜸으로 자리할 밖에. 왜냐하면 간명하게 전달하는 폼은 꼭 그림이나 사진 등의 예술품과도 같은데, 곱씹을수록 새어 나오는 의미랄까 하는 것들은 어디 비할 바 아니지 않습니까.



여기서 잠시, 시인이 바라보는 시는 어떤 모습일지. 김광규 시인의 말 옮깁니다.


ㄱ과 ㅎ사이를 오고 가는 흔들이가 있다고 하자. 이때 ㄱ을 꿈이나 환상, 또는 감성이라 하고, ㅎ을 삶이나 현실, 또는 이성이라 한다면 이 흔들이의 운동을 크게는 역사적 사조의 흐름으로부터 작게는 개인적 욕망의 진폭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조화의 원칙과 질서의 공식을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문학에 적용해본다면 흔들이의 위치 ㄱ, ㄴ, ㄷ, … ㅍ, ㅎ들은 바로 문학의 본질적 특성과 시대적 위상 및 사회적 기능을 나타내게 된다. 시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 세상에는 시가 꼭 ㄱ과 같은 것이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도 있고, ㅎ에 가까운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으며, 또 ㄱ과 ㅎ의 중간에서 그 이상적 좌표를 찾으려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어느 위치도 흔들이의 운동 전체를 대표할 수는 없으므로, 어떤 견해를 가지고 씌어진 작품이든 그것은 시의 한 형태를 보여줄 수 있을 뿐이다.

동양이나 서양이나 시는 옛날에 모두 ㅎ에서 비롯되어 ㄱ쪽으로 발전해왔다. 우리의 시는 과연 이 흔들이의 어느 지점에 와 있을까. ㄱ으로부터 ㅎ의 방향으로 움직여온 20세기의 우리 시는 1970년대 후반에 ㅅ, ㅇ, ㅈ쯤에 이르렀다가 1980년대 접어들자 ㅎ까지의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완성하지 못한 채 다시 ㄱ쪽으로 되돌아가고 있는 것 같다. 흔들이의 운동으로서는 정상적인 주기를 채우지 못한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이다. 문학뿐만 아니라 모든 사물이 자연스럽게 움직일 수 있을 때 가장 그것답고 자유로운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_김광규 시인의 말 전문, 시집 『아니다, 그렇지 않다』 표4


어떠세요? 'ㄱ과 ㅎ 사이', 저로서는 구구절절 옳다 여겨지네요. 한 폭 그림이라고 진경산수화 뿐일까요. 가지각색인 것처럼. 그저 저로서는 여러 시인들의 그 다양한 시선에 기대어 이 세계를 새로이 바라보게 되니 그 자체가 즐거울 따름입니다. 때문에 자기 속에 이는 것들을 표현으로 길어올려 말글로, 詩로 담아내는 냥반들 기쁨은 오죽할까 싶습니다. 솔직히 부럽군요 ~ *_* (그렇다고 무턱대고 숭앙하진 않습니다. 그 -빠 체질은 못 되는 듯;; 반골이야말로 제 기질의 default 값이지 싶네요, 허헣)


그야말로 시간으로든 공간으로든 인간으로든 한 편에 담아내니 그 진액의 묽고 진한 정도 따라 이 몸과 마음도 바다처럼 잠잠에서 만장에 이르는 격랑으로 출렁입니다. 어떤 경험이 이 같은 진폭을 이 마음에 선사할 수 있을지.. 저로서는 짐작 못하겠어요. 이러니 아니 좋아할 수 있냐 이 말입니다~~




오늘은「조개의 깊이」를 다시 읽어봅니다. 읽고 난 뒤 마치 인생 다 살아낸 양 지친 느낌에 사로잡히는 동시에 뭔가 그 소진에 남김이 없는 듯하여 후련함마저 느낀(정말이지 하얗게 불태웠다 싶은) 詩. 저는 그러했습니다.


결혼을 한 뒤 그녀는 한번도 자기의 첫사랑을 고백하지 않았다. 그녀의 남편도 물론 자기의 비밀을 말해 본 적이 없다. 그렇잖아도 삶은 살아갈수록 커다란 환멸에 지나지 않았다. 환멸을 짐짓 감추기 위하여 그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말을 했지만, 끝내 하지 않은 말도 있었다.
환멸은 납가루처럼 몸 속에 쌓이고, 하지 못한 말은 가슴 속에서 암세포로 굳어졌다.

환멸은 어쩔 수 없어도, 말은 언제나 하고 싶었다. 누구에겐가 마음속을 모두 털어 놓고 싶었다.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는다면, 마음놓고 긴 이야기를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때로는 다른 사람이 비슷한 말을 해 주는 경우도 있었다. 책을 읽다가 그런 구절이 발견되면 반가와서 밑줄을 긋기도 했고, 말보다 더 분명한 음악에 귀를 기울이기도 했다. 그러나 끝까지 자기의 입은 조개처럼 다물고 있었다.

오랜 세월을 끝없는 환멸 속에서 살다가 끝끝내 자기의 비밀을 간직한 채 그들은 죽었다. 그들이 침묵한 만큼 역사는 가려지고 진리는 숨겨진 셈이다. 그리하여 오늘도 우리는 그들의 삶을 되풀이하면서 그 감춰진 깊이를 가늠해 보고, 이 세상은 한번쯤 살아 볼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

_김광규,詩 「조개의 깊이」 전문


캬~~ 쐬주 생각 절로 나지 않습니까?! 이거면 되는 거 아닌가요?? 솔직히 감상을 형언한들 시인의 시구 이상 더 뭘 어찌 표하겠습니까;; 다만 이를 알고 군더더기일망정 나름의 소회를 조금씩 형언하여 보는 일 자체는 굉장히 중요한 것 같아요. 시인이, 작가가 세계를 이해하고자 다가서는 것과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시인이든 작가이든 그네들 작품에 다가서려는 나름의 노력이, 자신이 느끼는 바 그 깊이를 더하도록 돕는 방편이 될 테니. 이만 총총 (__)




붙임. 1 : 시인이 많답니다(함량 미달 운운하고 싶진 않고 다만, 쏟아내려는 욕망을 좀 뭉근히 붙들 필요도 있지 않나 생각은 합니다. 이쯤 하고 젖혀 두지요). 이는 우리나라 한글이 그만큼 뛰어나다는 반증일 겁니다. 육신의 감각으로 세계와 조응하는 순간순간 내면에 이는 갖가지 상을 붙잡기 위한 도구가 마땅해야 하는데 이런 면에선 자모 쳬계의 한글이 월등하잖나 싶습니다. 그러니 이를 보유한 우리나라는 Top 순위일 밖에요. 당연하다 싶습니다. (비약이겠는데.. 저로서는 압도적이지 않은 게 오히려 이상하다 싶습니다. 어디까지나 사견입니다만.. 그래도 요사이 글로벌 무드, 쬐금씩 이쪽에 젖어드는 듯 '_' )


붙임. 2 : 이따금 종종 이런 느낌 나누며 술잔 기울이면 좋겠다 바라고 있습니다. 사각공간 인근 거주하시는 분 가운데 연령/성별 무관, 여러분이면 더 좋고, 관심 있는 분 언제라도 환영입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