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빛을 보면 불안하다 몸 아픈 곳을 짚어내는 빛이며 깊게 스며들어 뼛속까지 아린 자주감자고 혓바닥까지 늘어진 자목련 꽃잎이며 피 터지게 싸우고 난 수탉의 볏이다 구구절절, 피 멍 든 생들은 처음부터 그런 빛 그런 몸을 지녔으니 더 아플 것 없겠다 쉽게 말하지 말라 세상이 온통 자줏빛이다 누구는 상처를 꽃으로 읽지만 나는 벌써 꽃이 상처로 보인다
_박소유,詩 「자줏빛 紫」 전문
당초 '꽃'이 만발하는 광경이란 그야말로 상처傷處의 문門이, 그러니까 제각각의 상傷이 거居하던 그 모든 처소處所의 문門이, 열리는 현장일지 모릅니다. 세상이 등진 가난과 그에 깃드는 쓸쓸함이 차오르다 마침내 넘치고 마는 한때를 목격한 것일지도 모르고요.
이를 아름다움으로 가늠하며 정형화하는 제각각의 잣대와 기준. 이것이 못내 아쉬운 건 '상처'를 '꽃'으로 소비하는 '일률一律'에 복속되는 형편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 정작 그 '상처'를 프로듀싱하는 이윤 추구 서사에 대한 성찰은 모르쇠하며 거리 두는 이기利己. 이러한 이기들 간 차이를 과연 '천편千篇'으로 여길 수 있을지, 아니 여긴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지..
'꽃'으로 현현顯現한다는 개성個性의 진면목이라 해봐야 죄다 '상처'요 그 벌어진 틈에 불과하다면, '온통 자줏빛'인 이 '세상', 이 세계가 앓는 병病을 바로 보고 책임져야 마땅하다는 데에 이를 밖에 다른 도리 없지 싶습니다. 크든 작든 많건 적건 '상처' 없는 사람, 상傷이 머무는 처소 아닌 육신이야말로 드문 형편이니. 문 열고 나오는, 틈 비집고 나오는 호소/세음世音을 바로/자세히 보아야[觀] 할 때는, 훗날 어느 때 아닌, 닥치는 매순간 곧 지금/당장일지 모르겠습니다.